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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파동에서 채집한 현재, 음악에 담았죠" 3집 낸 인디 포크 가수 정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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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파동에서 채집한 현재, 음악에 담았죠" 3집 낸 인디 포크 가수 정밀아

입력
2020.12.30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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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 포크 싱어송라이터 정밀아. 금반지레코드 제공

인디 포크 싱어송라이터 정밀아. 금반지레코드 제공


‘늦은 밤까지 기차소리가 / 들리는 이 동네에는 / 좁은 골목 사이로 / 잘린 햇빛 돌아나가지 / 지금도 미싱 소리가 뛰고 (중략) 떠도는 방랑자의 낡은 가방도 / 내치지 않는 곳’(‘오래된 동네')

민중가요의 투쟁가 같은 리듬 위로 서울역 인근 청파동의 풍경이 펼쳐진다. 낮은 집들이 차곡차곡 높은 언덕 위까지 쌓여있는 곳. 쉴 새 없이 과거를 무너뜨리고 지우는 동네. 화자는 노래한다. ‘오래된 도시에 더는 / 오래된 것들이 없고 / 오래된 동네에 더는 / 오래된 사람이 없네’

골목길에서 내려와 서울역 광장으로 향한다. 멀리서 들여오는 집회 소리. ‘솟은 깃발 사이로 / 울려 퍼지는 함성’(‘광장’) 사이로 누군가의 눈물과 절규, 외면과 침묵, 순간과 영원, 일부와 전부가 스치며 지나는 것을 본다.

인디 포크 싱어송라이터 정밀아는 지난 10월 발표한 세 번째 앨범 ‘청파소나타’에서 ‘푸른 언덕’이라는 뜻의 청파(靑坡)동을 스케치한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다 2014년 데뷔작 ‘그리움도 병’을 낸 그가 ‘은하수’ 이후 3년 만에 발표한 앨범이다. 풍경화를 그리는 듯한 섬세한 묘사,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생생한 현장감, 일기의 글귀 몇 구절을 엿보는 듯한 내밀한 이야기가 10곡에 담겨 있다. 처음 들을 땐 시청각적인 가사에 감각을 빼앗기고, 다음엔 노랫말을 조용히 감싸는 다채로운 악기와 목소리, 리듬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는 앨범이다.

정밀아 3집 '청파소나타' 커버

정밀아 3집 '청파소나타' 커버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시대적이고 사회적인 이 역작은 한 해를 정리하는 연말을 맞아 더 주목받고 있다. 평론가들이 뽑은 ‘올해의 앨범’ ‘올해의 노래’에 잇달아 이름을 올리면서다. 서정민갑 대중음악평론가는 “정밀아의 성장과 변화를 집약한 앨범”이라며 올해의 포크음반으로 치켜세웠고,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도 올해를 빛낸 노래 중 하나로 이 앨범에 담긴 ‘어른’을 선정했다.

최근 청파동에서 만난 정밀아는 “1집에선 예전의 이야기를 했고 2집은 지금을 바라보기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담았는데 이번 앨범에서 오늘을 현재 시점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했다. 무엇보다 “시각이나 시선이 더 깊어지고 넓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우선이었다. ‘청파소나타’가 클로즈업 화면과 심도 깊은 광각 화면을 함께 보여주는 다채로운 풍경화가 된 건 그런 고민의 결과다.

앨범에 영감을 준 것은 지난해 10월부터 그의 새 거처가 된 청파동이었다. 창문을 열면 남산타워가 보이는 키 작은 집. 지방 곳곳으로 공연을 다니다 밤 늦게 연희동까지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게 힘들어 찾은 곳이다. 그는 집 근처를 산책하고 때론 서울역을 지나 남대문, 명동, 을지로, 서촌까지 걸어 다니며 사람들을 관찰하고 도시의 온갖 소음을 들었다. 가을은 겨울이 되어 '춥지 않은 겨울밤'의 재료가 됐고, 팬데믹 속에서 여름이 되며 '초여름'을 낳았다.

코로나 시국 속에서 ‘정성껏 살아갑니다’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현실을 이야기하는 ‘환란일기’나 ‘광장’처럼 현 시대를 바라보는 곡이 있는가 하면 지극히 개인적인 곡도 있다. 그 시작도 서울역이다. 지방 공연에서 돌아온 다음날 아침 어머니와 전화하는 내용을 담은 ‘서울역에서 출발’은 가수 정밀아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 같다. 그는 대학 가서 ‘멋진 화가가 될 줄’ 알았지만 ‘딴짓을 아주 열심히’ 하다 가수가 된 자신의 일상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서울역에서 출발한 내 스무 살은 / 한 백번은 변한 것 같아’라며 현재의 자신을 본다.

정밀아가 찍은 서울역 광장 풍경. 금반지레코드 제공

정밀아가 찍은 서울역 광장 풍경. 금반지레코드 제공

“실제로 막걸리를 마시며 쓴 곡”이라는 ‘어른’은 일본 만화가 마스다 미리가 그린 8컷 만화를 보는 것 같다. ‘비 오던 어느 날에 안주도 없이 / 막걸리를 마셨어 / 어머나 내가 왜 이러는 거지 / 어른이 된 것 같잖아’라면서 ‘정말 나는 어른이 된 건가 / 진짜 이렇게 살면 되나’ 하고 자문한다.

포크를 중심으로 스탠더드 재즈, 민중가요 리듬까지 넘나드는 편곡은 노랫말이 더욱 또렷하게 전달되도록 돕는다. “뭔가를 많이 하지 않는 듯한 기교” “연주하지 않는 듯한 연주”를 주문한 정밀아의 요청에 따라 연주자들은 끓기 직전의 물처럼 뜨거움을 숨긴 채 차분하고 조용하게 악곡을 풀어헤친다. ‘광장’에서 심장을 두들기듯 내리치다 사라지는 드럼 연주처럼 말이다. 교회 성가대와 합창단 활동을 했을 정도로 가창력에 자신이 있는 정밀아도 노래하지 않는 듯 노래한다.

정밀아는 가수이자 작곡가이며 화가이자 사진가다. 음악과 미술, 사진은 별개의 작업이 아니라 동시에 진행된다. 이번 앨범을 만들면서도 여러 편의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었다. 언젠가는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도 한다. “그런 작업이 동시에 이뤄지는 시스템이 제 안에 잡혀가고 있어요. 그렇게 해야 음악도 그림도 더 재미있고 흥미로워질 것 같아요. 그게 내게 맞는 방식이라는 걸 알게 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죠. 뭔가 안 하던 걸 하고 싶어 근질근질한데 내년엔 새로운 걸 시작하게 될 것 같아요.”


고경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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