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센터로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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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센터로 오세요

입력
2020.12.28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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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30대 아들과 함께 살던 60대 노모가 사망한 채 발견된 서울 서초구 방배동 다세대주택의 모습. 이한호 기자 han@hankookilbo.com

몇 년 전 한국일보를 떠난 친애하는 한 후배는 사직 후 만난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었다. “(사직을 안 했다면) 다음 칼럼에 ‘주민센터로 오세요’라고 쓰려고 했거든요. 관련 일을 하는 사람이 그러는 거예요. ‘생계가 힘들고 죽을 것 같을 때, 그냥 주민센터를 찾아오면 된다. 제도권에서 해줄 것이 없으면 민간 지원이라도 연결해줄 수 있다’라고요. 그래서 제가 물었어요. ‘정말 그렇게 써도 되느냐. 책임질 수 있느냐’고. 그랬더니 쓰래요. 그렇게.”

그때 ‘송파 세 모녀 사건’과 비슷한 복지 사각 지대의 문제가 화제에 올라 했던 말인 것 같은데, 구체적인 소재와 그 말을 했다는 취재원의 신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후배는 쓰고 싶었던 칼럼을 쓰지 못하고 떠난 걸 아쉬워했고, 명확히 하지는 않았지만 ‘선배가 대신 써줄 수 없어요?’라고 내게 요청하는 느낌을 받았다.

칼럼 쓸 차례가 찾아오면 간혹 후배의 말이 떠오르곤 했다. 하지만 내가 직접 취재한 게 아니라 접어뒀다. 무엇보다 독자가 ‘책임질 수 있어요? 나는 주민센터 가서 무시당하고 문전박대 당했는데’라고 물어온다면, 할 말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집에 쌀이 떨어지고 병원비가 없을 때, 아이의 학비를 댈 수 없을 때, 지원 받을 방법을 인터넷으로 찾는 게 어렵고 두렵기만 할 때, 서민들이 수만 번 머뭇거리며 찾아갈 곳은 주민센터밖에 없다. 최근 ‘방배동 모자 사건’ 또한, 사건이 알려진 후 가장 많이 추궁을 당한 곳도 주민센터였다. 그만큼 풀뿌리 복지에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에는 중앙·지방 정부를 합쳐 수많은 복지 제도들이 있다. 복지 담당 기자도, 심지어 제도를 집행하는 공무원도 자료를 찾아보지 않으면 다 알지 못할 정도다. 어떤 제도는 예산이 다 집행되지 못해 남기도 한다.

그러니 월세가 밀리고, 전기가 끊기고, 나락으로 떨어진 당신을 아무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면, 용기를 내서 주민센터의 문을 열고 들어가 달라.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상을 덮고 가난과 우울의 두께가 더할수록, 주민센터의 문턱은 낮아져야 한다. 아니, 시절과 상관없이 항상 낮아야 한다.

주민센터의 분위기가 사무적이고 냉랭해서 주눅이 든다고 해도, 그건 관료들 분위기가 원래 그렇다. 그 속에 당신을 향한 따뜻한 심장이 뛰고 있는 이가 있을 것이다. 예전 보건복지부 출입기자일 때 만났던 한 주민센터의 복지직 공무원은 “인력이 부족해서 일일이 찾아가서 돌보지 못 한다”며 “혹시 우리가 담당하는 기초생활수급자가 도움을 못 받고 사망했다는 기사가 나올까 봐, 그게 제일 두렵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당연한 이야기를 한가지 덧붙이자면, 주민센터를 통해 돈이나 서비스를 지원받을 때 부끄러워 할 필요 없다. 혹시 공무원이 자기 돈이라도 주는 듯 권위적이고 깐깐하게 굴어서 위축된다면, 상기하길 바란다. 그 돈은 그 공무원의 돈이 아니라 노동자 혹은 사업가들이 당신이 생을 지탱할 수 있도록 안전망이 되고자 내놓은 세금이라는 점을. 그게 국가와 세금제도가 있는 이유이고, 그 세금을 내는 사람들도 위기에 처했을 때 같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당신이 주민센터를 찾아 그걸 받는다면, 그건 우리 모두의 보람이기도 하다.



이진희 어젠다기획부장 rive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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