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불교에서 신은 찬밥이다

입력
2020.12.23 15:00
수정
2020.12.23 17:49
25면
0 0
자현
자현스님ㆍ중앙승가대 교수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서양용은 불을 뿜으며, 금화를 좋아하는 탐욕스러운 악을 의미한다. 그러나 중국용은 자신을 극복하고 승천하는 군주의 상징이다. 또 인도용은 용궁에 살며,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는 축생으로 이해된다. 이런 차이는 세 용이 모두 다른 문화 배경과 기원을 가지기 때문이다.

인도용이 불교를 타고 동아시아로 전래하면서, 두 용의 개념은 혼란을 겪기 시작한다. '삼국유사' '문무왕'조에는 흥미로운 대화가 있다. 문무왕이 스님에게 "짐은 사후에 호국용이 되어 불교와 나라를 수호하고자 합니다"라고 하니, 스님은 "용이란 축생인데, 왜 용이 되려 하십니까?"라고 한다. 중국용과 인도용의 개념이 혼재되면서, 서로 다른 방언을 하는 상황인 게다.

여기에 최근에는 유럽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게임의 영향으로, 젊은이들에게 용은 반드시 잡아야 하는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들에게 용은 고급 아이템으로 치환되는 중간 빌런 정도일 뿐이다.

용의 이미지 혼란은 용이라는 동일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다. 즉 용은 용이 돼 지시하는 대상이 각기 다른 것이다.

종교에 있어서 '신(神)'도 마찬가지다. 기독교나 이슬람에서의 신은 절대성을 가진 최고의 존엄이다. 그러나 불교나 도교 내지 유교에서의 신은 우리보다 낫지만 이들 역시 어쭙잖을 뿐이다. 왜냐하면 유일신 종교에서는 신이 궁극적 대상이지만, 불교와 동양 종교에서는 이러한 절대점을 성인(聖人), 즉 '완전한 인간'이 차지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불교에서 신은 존숭의 대상이지만, 동시에 찬밥이기도 하다. 따뜻한 밥이 없으면 찬밥도 좋다. 그러나 같이 있다면 찬밥은 분명 선호되지 않는다. 딱 이 정도가 불교 안에서의 신의 위치라고 하겠다.

사찰의 법당에 들어가 보면, 신의 위치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부처님이 중앙에 커다랗게 앉아 있는 반면, 신들은 한 편에 졸업식의 단체 사진 마냥 뻑적지근하게 도열해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앉지도 못한 채 서 있는데, 이는 부처님이라는 어른이 계시므로 감히 앉지 못하는 것이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사찰에서는 아침저녁으로 예불(禮佛)을 올린다. 이 예불의 대상은 당연히 부처님이다. 부처님께 예를 갖추는 것이 '예불' 아니겠는가? 또 이때 예를 드리는 예법이 '절'이다. 해서 예배(禮拜)라는 말이 만들어지게 된다.

기독교의 전래 초기, 성당이나 교회를 예배당이라고 했더랬다. 이로 인해 현재까지 남은 표현이 교회의 주일예배 등에서 확인되는 예배라는 표현이다.

예배가 절을 하며 예를 표한다는 의미니, 예배는 사찰의 예불일 따름이다. 또 예배당 역시 그런 행위를 하는 집이라는 뜻이니, 사찰의 의미일 뿐이다. 즉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도저히 빌려서는 안 될 용어를 차용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침저녁 예불 시간에 스님들은 신들을 모신 신중단에는 절을 하지 않는다. 신은 스님보다 하열하다고 보기 때문에 예배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이다. 정치인은 강력한 힘을 가지며, 현대사회에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현대인은 정치인을 수단으로 볼 뿐 목적으로 추앙하지는 않는다. 스님에게 신도 이와 같다. 스님보다 강력하고 필요하지만, 신은 목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스님의 목적은 붓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교는 붓다라는 인간을 숭배하는 종교인가?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다. 왜냐하면 불교는 붓다를 숭배하는 종교라기보다, 스스로 붓다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광화문에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을 모시는 것은 이들을 신처럼 숭배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분들의 위대함을 기리고, 우리도 본받기 위함인 것이다. 불교에서 예불의 의미도 딱 이런 정도다. 그리고 그 범주 안에 신은 비껴나 있다. 마치 정주영·이건희 회장님도 대단하지만, 이분들을 광화문에 모실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신에 대한 인식 차이는 기독교의 노래 '저 높은 곳을 향하여'와 불교의 범종에 새겨져 있는 '하향비천상(下向飛天像)'을 통해 간명하게 대비된다. 불교는 신조차도 '하향', 즉 인간계로 내려오는 구조인 것이다. 즉 '인간을 위한 신' 정도의 의미가 바로 불교의 신이라고 하겠다.

자현 스님ㆍ중앙승가대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