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왜 이리 재미없지? 요즘 들어 인생 좌표가 흐릿해지는 느낌이야.”
타이벡 감귤 한 상자를 들고 사무실에 온 지인이 한숨 쉬며 중얼거렸을 때 나는 그만 사레가 들렸다. 20년 넘게 서로 살아내는 속내를 공유하며 지냈지만, 지금처럼 멍한 그의 눈동자를 본 적은 없었다. 달콤새콤한 귤을 연거푸 까먹는 데만 골몰하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 귤 맛을 능가할 기분 좋은 자극을 내가 그에게 선물할 차례였다. 다행히 하나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데이비드 스노든은 역학(疫學·개인과 집단이 특정 질환에 걸리거나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지역이나 상황과 어떤 연관성을 지니는지 연구하는 학문) 분야에서 떠오르는 신예였다. 그가 수녀님을 연구 대상으로 삼고자 한 건 그들이 매우 동질적인 집단이란 특성 때문이었다. 수녀들은 동일한 생활방식 아래 살고 경제 상황도 비슷했다. 같은 의료서비스를 받으며 술 담배를 않는다는 공통점도 있었다. 스노든에게는 행운도 따랐다. 19세기 중반 독일에서 대서양을 건너온 수녀들이 세운 북아메리카 노트르담 교육수녀회와 그곳 소속 수녀 678명이 스노든에게 도움을 주기로 흔쾌히 나선 것이다.
여기에 보물과도 같은 자료가 그의 손에 들어왔다. 1930년 9월 22일, 북아메리카 수녀원장은 젊은 수녀들에게 자신의 이력과 기억에 남는 경험, 수도원에 들어오기로 결심한 이유 및 삶의 목표 등을 200~300단어로 써서 제출하라고 했다. 비교적 중립적인 지침이었지만 짧은 글에 담긴 감정은 천차만별이었다. 가령 한 수녀의 글은 이렇다. ‘나는 1909년 9월 26일, 7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수녀 생활 중에는 화학과 라틴어를 가르쳤다. 앞으로 나는 종교를 전파하고 스스로 성화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다른 어느 수녀의 글은 아래와 같다. ‘신은 태어날 때부터 나에게 무한한 호의를 베풀었다. 수녀원에서의 공부는 첫날부터 나를 들뜨게 했다. 성모 마리아의 은총 아래 살아가게 될 나는 빛처럼 쏟아지는 이 사랑을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이들과 나눌 수 있을지 설레는 마음으로 궁리한다.’
스노든은 180편의 자서전을 동료들에게 건네 사랑과 이별, 행복과 좌절 같은 감정적 표현 및 목표의 구체성을 분류하도록 한 뒤 수녀들의 생존 여부를 분석했다. 놀랍게도 긍정적인 단어를 가장 적게 사용한 그룹의 수명은 평균 86.6세였다. 반면 감사하는 마음과 목표의식을 가장 적극적으로 드러낸 그룹은 93.7세였다. 이게 다가 아니었다. 수녀들의 의료기록을 분석한 결과, 후자 그룹이 모든 면에서 훨씬 더 건강한 삶을 영위한 것으로 드러났다. 아마도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감정이 소화 및 신진대사를 제어하는 자율신경계에 도움을 준 것 같다고 그곳 의료진은 분석했다. 그뿐인가? 스노든의 연구를 또렷하게 뒷받침하는 최신 뇌과학의 성과는 하나둘이 아니다.
그러니까 무병장수를 위해서라도 2021년의 구체적 목표 세 개를 세워 크리스마스 전까지 이메일로 제출하라는 내 요구에 지인은 으하하! 크게 웃으며 떠났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나도 세 가지 내년 목표를 세웠다. 첫째, 손바닥만 한 고향 땅에 열매채소를 3모작 할 것. 둘째, 그 옆에 예쁜 원두막을 지을 것. 셋째, 흠 이건 영 민망해서….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말고 조용히 실현하는 게 나을 성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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