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즈베키스탄 출신 고려인 4세이지만 저도 한국사람이잖아요. 정체성 때문인지 모국에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그래서 한국에서 열리는 아시아 최대 영화제인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번쯤 상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수상이 제겐 상징적인 의미가 있죠.”
지난 10월 열린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영화 '쓰리'로 뉴커런츠상을 수상한 박루슬란(40) 감독은 최근 한국일보를 찾아 이렇게 수상 소감을 밝혔다. 고려인 출신 영화인으로서 부산영화제에서 수상한 건 그가 처음이다. 뉴커런츠상이 아시아의 재능 있는 신인 감독을 발굴하고 격려하기 위해 마련된 만큼, 그가 지금 가장 주목할 만한 신인감독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는 “언제 개봉할지 모르지만 한국 관객들이 영화를 어떻게 볼지 너무 궁금하다”고 했다.
영화제 수상작이어서 난해한 예술영화가 아닐까 추측할 수 있지만 ‘쓰리’는 다분히 상업적인 장르 영화다. 카자흐스탄과 한국 합작 영화인 이 작품은 부산영화제 공개 후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이나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쎄븐’을 연상시키는 수작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살인의 추억’처럼 이 영화도 40여년 전 당시 소련을 떠들썩하게 했던 연쇄살인범에 관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감독은 신참 형사를 주인공을 내세워 주로 여성들을 상대로 잔혹한 범죄를 저지른 살인마를 추적한다. 1970년대 후반의 소련을 재현한 카자흐스탄에서 펼쳐지는 추적극이 섬뜩한 공포감과 긴장감 넘치는 스릴을 안긴다.
박 감독은 실제로 이 사건을 수사했던 전직 형사를 우연히 만나게 된 뒤 영화를 구상했다. 자신도 어렸을 적 관련 사건을 들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있어 더 흥미로웠다. 그는 함께 시나리오를 쓸 작가를 섭외해 곧바로 제작 준비에 들어갔다. 예산은 약 5억원. 카자흐스탄의 영화 시장을 고려할 때 그 정도가 최대 한도였다. 국내 영화 스태프들과 카자흐스탄을 오가며 1년 만에 영화를 완성했다. 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나라를 배경으로 과거의 세계를 그려야 해서 어렵기도 하고 재밌기도 했다”고 말했다.
‘쓰리’는 박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다. 9년 전 고향인 우즈베키스탄에서 1,500만원의 초저예산으로 촬영한 데뷔작 ‘하나안’이 스위스 로카르노영화제에 초청받는 등 호평을 받았지만 차기작을 찍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나리오를 직접 쓰는 감독을 높게 쳐주는 한국 영화계에서 러시아어로 시나리오를 쓰는 그는 관심 밖이었다. 그는 “’쓰리’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원하는 대로 찍고 싶어서 직접 제작까지 했다”고 했다.
박루슬란 감독은 우연찮게 영화에 빠져들었다. 20년 전 한국어를 배우러 어학연수를 왔을 때만 해도 그는 “아무런 꿈이 없는 청년”이었다. 그러던 중 마치 신의 계시처럼 갑자기 영화가 꿈이 됐다. “춘천에 갔다가 시간이 남아 극장에 들어갔어요. 엄청 재미없는 외국영화여서 도중에 잠이 들었죠. 깨어났는데 갑자기 영화를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말도 안 된다 하겠지만 저도 그런 경험이 처음이었어요.”
우즈베키스탄에 돌아가 타슈켄트사범대를 다니면서도 온통 영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우즈베키스탄은 사실상 영화의 불모지. 그런 그에게 또 한번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한국에서 민병훈 감독과 제작진이 촬영하러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가 무작정 참여하게 해달라고 했다. 필연과 우연이 겹치며 세 번을 만났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그러나 그의 집념에 민 감독이 두 손 들고 그를 스태프로 기용했다. 나중에는 영화 ‘나의 결혼원정기’(2005)의 우즈베키스탄 촬영에 참여했고, 2006년 한국예술종합학교에도 합격했다.
박루슬란 감독은 고려인 동포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고 싶다고 했다. “우즈베키스탄에서도 고려인들은 살아남기 위해 싸워야 합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죠. 제가 처한 환경과 싸우고, 주위의 편견과도 싸워야 했습니다. 저보다 어린 고려인 친구들이 저를 보고 꿈을 가졌으면 해요. 저도 앞으로 계속 나아갈 겁니다. 언젠가는 꼭 할리우드에서도 영화를 찍고 싶어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