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00쪽 기록 되짚어 찾은 '2명의 공범' 가능성...15년 미제 풀었다

이전기사

구독이 추가 되었습니다.

구독이 취소 되었습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저장이 취소 되었습니다.

4300쪽 기록 되짚어 찾은 '2명의 공범' 가능성...15년 미제 풀었다

입력
2020.12.21 08:30
0 0

[과학수사의 첨병, 프로파일러의 세계]
<9> 갱티고개 노래방 여주인 살인사건

편집자주

범죄 드라마나 영화에서 '초능력자'처럼 등장해 범죄자의 감정선을 무너뜨리는 프로파일러. 그러나 실제 프로파일러는 끊임없이 범죄자 심리나 행동패턴을 분석해 범행의 이유를 찾는 나침반 역할을 합니다. 한국일보는 격주 월요일마다 범죄 현장 뒤에서 치열한 두뇌싸움을 벌이는 프로파일러의 세계를 조명합니다.


2017년 충남 아산의 갱티고개에서 충남경찰청 소속 형사들이 현장검증을 하고 있다. 충남경찰청 제공

2007년 여름 충남의 한 농촌 마을. 경찰은 논두렁에 승용차 한 대가 쳐박혀 있다는 신고를 접수했다. 차 안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뒷좌석 바닥에 누군가 불을 지르려 한 흔적이 있었다. 차량 조회 결과 차주는 실종 신고 상태인 30대 중반의 여성. 경찰은 주변을 수색한 끝에 차량에서 100m 떨어진 농수로에서 여성의 지갑과 속옷을 발견했다. 살인과 시체 유기가 강력하게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최규환(39) 충남경찰청 과학수사계 경위(당시 경장)는 파릇파릇한 신참 프로파일러 시절 출동했던 그 현장을 잊을 수 없다. 당시 그는 현장 전체가 내려다 보이는 작은 야산에 올라, 범인의 범행 동선을 머릿 속에 그리며 현장 약도를 그렸다.

경찰은 주요 용의자인 한 남성을 지목해, 공개 수배 끝에 체포했다. 하지만 끝내 그를 재판에 넘기지는 못했다. 피해자 시신을 발견하지 못해 혐의를 입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용의자는 경찰서를 걸어나갔다.

이듬해 여름, 한 약초꾼이 산에서 심하게 부패된 여성의 시신을 발견했다. 1년 전 실종된 그 여성이었다. 시신이 묻혀 있던 곳은 사건 직후 최 경위가 약도를 그리던 곳에서 불과 10m 정도 떨어진 지점이었다. 바로 옆에 피해자의 시신이 묻혀있는지도 모른 채, 최 경위는 약도를 그리고 있었더 것이다. 죄책감과 후회 때문에 며칠밤을 뜬 눈으로 지새웠다. 1년 전 범인을 놓친 것이 모두 자기 탓인 것만 같았다.

프로파일러 8명이 뭉쳤다... '중요 장기미제 사건 TF팀'

최규환 충남경찰청 프로파일러(가운데) 등이 15년 동안 미제로 남았던 '갱티고개 살인사건' 재수사를 위해 2017년 1월 범죄분석회의를 진행하고 있는 모습. 충남경찰청 제공

8년 후인 2016년 12월. 초짜 티를 벗고 유능한 프로파일러로 자리매김한 최 경위는 마음 속에만 품어 왔던 기획안을 경찰청에 제출했다. 기획안 제목은 '중요 미제사건 분석 TF팀 운영 계획'. 각 지방청에 흩어져 있는 프로파일러들을 한 곳에 모아 장기미제 사건들을 하나하나 추적해 재검토하자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8년 전 범인을 놓친 그 경험에서 시작된 기획이었다. 피해자에 대한 죄스러움을 갚을 방법은 다른 미제 사건을 해결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마침 살인죄의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태완이법'이 시행(2015년)되면서, 미제 살인사건을 해결해야 한다는 여론도 강하진 때였다. 기획안은 즉시 통과돼 2017년 1월 실행에 옮겨졌다.

프로파일링 대상은 전국 각지의 장기미제 강력 사건이다. 최 경위에 따르면 201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미제 사건 발생율은 '제로(0)'에 가깝게 떨어졌다. 거리마다 폐쇄회로(CC)TV가 설치되고, 첨단 과학 수사 기법이 도입됐기 때문이다. 경찰의 수사력으로 해결되지 못할 사건은 없었다. 하지만 2010년 이전에 발생한 미제 사건 증거와 기록은 여전히 창고에 먼지를 뒤집어 쓴 채 그대로 남아있었다.

최 경위를 포함해 5개 지방청 소속 8명의 프로파일러가 '드림팀'을 구성됐다. 이들이 맡은 첫 사건은 2002년 충남 아산시에서 발생한 '갱티고개 노래방 여주인 살인 사건'이었다. 버려진 차량, 실종된 여성, 야산에서 발견된 시신까지. 갱티고개 사건은 최 경위에게 큰 상처로 남은 2007년 '그 사건'과 매우 공통점이 많았다. 특히 갱티고개 사건은 현장에 용의자의 유전자정보(DNA)가 남아있어 사건 해결의 가능성이 남아 있었다.

8명의 프로파일러는 2017년 1월 11일 충남경찰청 본관 2층 과학수사계 실험실에 모였다. 4,300여장의 경찰 수사 기록, 사건 현장 및 증거 물품 사진 수백장이 테이블 위에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주어진 시간은 2박3일. 프로파일러들이 받아든 15년 전 갱티고개 살인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았다.

◆2002년 갱티고개 사건 개요

-2002년 4월 18일 오전 7시10분쯤 운동을 하던 공무원이 충남 아산시 송악면 갱티고개에서 시신 한 구를 발견

-피해자는 발견 장소에서 차로 20분 거리인 아산시 온천동 번화가에서 노래방을 운영하던 40대 여성 A씨

-부검 결과 범인은 이미 한 차례 질식해 정신을 잃은 피해자의 목을 날카로운 흉기로 절단한 것으로 추정

-같은날 오전 10시36분부터 낮 12시55분까지 인근 8곳의 현금인출기(ATM)에서 모자와 마스크를 쓴 용의자가 피해자 명의의 카드로 195만원을 인출

-CCTV에 찍힌 용의자의 인상착의를 토대로 수배에 나섰으나 신원을 특정하지 못함

-A씨가 운영하는 노래방에서 300m 떨어진 초등학교 주변 도로에서 A씨의 검은색 세피아 승용차가 발견

-조수석 바닥에는 A씨의 신발이, 조수석 안전벨트에는 피해자가 아닌 신원 미상의 혈흔이 발견

15년 전 사건 현장에 가다

피해 여성의 시신이 발견된 충남 아산시 갱티고개. 충남경찰청 제공

최 경위는 장기미제 사건 프로파일링의 첫 단계는 확보한 증거와 사건 기록을 우선 순위에 따라 분류하고 정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증거에는 '사실 증거'와 '추론 증거'가 있습니다. 피해자의 사인이 다발성 경부절창(목 부분이 예리한 도구에 의해 여러 차례 베인 것)이라는 점, 차량 안에서 피해자의 신발이 발견된 것. 이건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반대로 피해자가 X라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줘서 채무 관계가 있는 경우, X가 채무 관계로 범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있다는 건 추론입니다. TF팀에서는 일단 추론은 전부 배제하고 사실 증거를 1순위로 놓는 작업부터 시작했습니다."

(최규환 충남경찰청 과학수사계 경위)

최 경위와 팀원들은 화이트보드에 사실 증거가 적힌 포스트잇을 수십장 붙여 나갔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부검보고서와 사인, 목격자의 증언, 차량의 위치. 증거 나열이 끝나고 이후 현장 답사가 이어졌다. 프로파일러들을 태운 차 두 대가 가파른 갱티고갯길을 올랐다. 그날 겨울바람은 유난히도 매서웠다.

이들은 A씨가 운영하던 노래방과 A씨가 평소 차량을 주차했던 초등학교 뒷편, 갱티고개, 피해자의 자택 등을 수십번 왕복했다. 사건 발생 예상 시간인 새벽에 갱티고개를 다시 한 번 찾기도 했다.

"계절과 시간에 따라 현장 분위기는 가지각색입니다. 같은 대학가라도 겨울방학일 때와 막 개강한 3월의 분위기가 다른 것처럼요. 한적한 시골밤도 그믐달인지, 보름달인지에 따라 시야가 많이 달라집니다. 현장에 가면 기록에는 없는 단서를 얻을 수도 있지요. 다행히 사건이 발생한 곳은 아산의 구(舊) 도심지였습니다. 비록 15년이 지났다고 해도, 사건이 일어났던 과거의 모습을 어느 정도 그려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2박3일 일정의 첫 날이 지났다.

증거가 말한다... "범인은 2명"

2002년 4월 18일 갱티고개 살인사건 범인이 피해자 명의 카드로 돈을 인출하던 모습이 담긴 폐쇄회로(CC)TV 영상. 연합뉴스

둘째 날부터 프로파일러 8명의 끝없는 토론이 펼쳐졌다. 수많은 증거들 중 의미있는 정보를 추리고, 추론을 통해 가능성이 높은 범행 시나리오를 좁히는 2단계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빛바랜 필름 인화 사진 수백장을 들여다 보며 프로파일러들은 당시 현장을 머릿속에 재구성했다.

"현장 사진은 컴퓨터 모니터로 보는 것보다, 필름으로 현상하거나 인쇄해서 보는 게 현장의 분위기를 더 잘 느낄 수 있더라고요. 왠지 촌스럽고 구식이지만 저는 이 방식이 더 좋아요."

최규환 충남경찰청 과학수사계 경위

이들이 주목한 건 차량 내부 증거들이었다. 차량 운전석에는 윈도우 브러시를 켜는 손잡이가 부러진 채 전선만 남아 운전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운전석의 방석은 조수석 방향으로 틀어져 있었고, 피해자가 신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구두 한 켤레가 조수석 바닥에 놓여있었다. 뒷좌석 오른편 바닥에는 담뱃재와 담배꽁초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조수석 안전벨트와 뒷좌석에서 남성형 DNA 혈흔이 발견됐다. 국과수 감정 결과, 담배꽁초에서 발견된 DNA와 동일했다.

"운전하다가 와이퍼 시동 손잡이가 부러질 가능성은 높지 않죠. 범행 과정 중 파손됐을 가능성이 높겠죠. 저희는 운전석에 앉은 피해자를 조수석의 범인이 폭행할 때 파손됐다고 추정했습니다. 조수석 바닥에 놓인 A씨의 구두를 토대로 유추하면 피해자는 조수석에 앉아있었다는 결론이 나와요.

그럼 A씨는 처음에는 운전석에 앉아 있었는데, 중간에 범인이 운전대를 잡고 A씨를 조수석으로 옮긴 것이겠죠. 차 밖으로 옮겨 타면 A씨가 중간에 도망칠 가능성이 있으니 차 안에서 A씨의 자리를 옮긴 거라고 추론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운전석의 방석이 조수석 쪽으로 틀어진 거였구요.

다음에는 뒷좌석의 담뱃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2002년이면 차 안에서 담배를 피워도 용인되던 시절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담뱃재를 차 안에다가 털지는 않잖아요, 창밖에다 털지. 피해자 본인이 아니라, 긴장한 용의자가 차 안에서 흡연했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그럼 범인은 앞좌석에도, 뒷좌석에도 있었다는 건데... 공범의 존재밖에는 이걸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최 경위와 동료들은 범인은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라고 확신했다. 제2의 범인이 있을 가능성은 15년 전 수사팀도 염두에 뒀지만, 한 가지 가능성 정도로만 언급됐을 뿐이었다. 퍼즐을 풀듯, 증거의 조각이 맞춰지자 사건의 새로운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작업은 증거를 토대로 프로파일링 보고서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었다. 프로파일러들은 1월 13일 새벽 2시까지 밤을 새워 보고서를 작성했다. 마지막날 담당 수사팀 앞에서 보고서를 토대로 브리핑을 했다. 보고서의 핵심 추론은 △공범의 존재 △범인은 피해자와 면식범 △계획적으로 흉기 준비 △금품을 빼앗기 위한 단순 강도라는 것. 특히 '공범 존재'가 미제사건 해결의 결정적 실마리가 됐다.

15년 만에 잡힌 범인... 역시 공범이 있었다

2017년 11월 대전지법 천안지원의 1심 판결문. 프로파일링 보고서가 증거물 요지에 포함돼 있다. 법원 제공

"경위님, 갱티고개 사건 범인이 붙잡혔다는데요."

5개월 뒤 담당 수사팀으로부터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범인을 검거했다는 소식이었다.

프로파일러들과 수사팀의 노력으로 15년만에 미제 사건을 해결한 것이다. 프로파일러들의 보고서를 넘겨받은 김도형 충남 아산경찰서 강력4팀장은 기존 용의선상에 오른 이들을 살펴보던 도중, 과거 참고인 조사를 받았던 B(51)씨에 주목했다고 한다. 유사 전과가 있는데다 노래방에서 명함이 발견돼 피해자와 면식 관계로 추정됐지만 차에서 발견된 DNA가 달라 배제됐던 용의자였다.

하지만 공범이 있다면 DNA가 B씨와 반드시 일치할 필요가 없었다. 2017년 6월 21일 다시 불려 온 B씨는 형사들의 7시간 집중 추궁 끝에 공범과 범행을 자백했다. DNA의 주인은 B씨의 회사 후배 C(40)씨였다. 일주일 뒤인 6월 30일 C씨도 경찰에 체포됐다.

사건의 전말은 프로파일링 보고서 결론과 큰 차이가 없었다. 법원의 1심 판결문에 따르면 B씨와 C씨는 충남 아산의 한 기업에서 일하던 직장 선후배 사이였다. 이들은 2002년 4월 5일 회사에서 동반 퇴사한 후 근처 여관에서 함께 머물렀다. 생활비가 부족해지자 평소 친분이 있었던 피해자를 대상으로 범행을 계획, 미리 갱티고개로 현장답사를 갔다.

이들은 2주 뒤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이들은 4월 18일 오전 2시30분 노래방 앞에서 피해자를 기다리던 중, 피해자가 영업을 마치고 나오자 "집에 가는 길에 우리가 지내는 여관까지 태워 달라"고 말하며 차에 동승했다. 조수석에 앉은 B씨가 오전 2시35분 헛기침으로 범행 실행 신호를 보냈고, 뒷좌석의 C씨가 흉기를 꺼내 피해자의 목에 들이대며 차를 세웠다. 운전석에 옮겨 탄 B씨는 피해자를 조수석으로 옮긴 뒤 갱티고개로 차를 몰았다. 그동안 C씨는 뒤에서 피해자의 목에 흉기를 겨누고 있었다.

차가 갱티고개에 도착하자, B씨는 피해자에게 "현금과 카드를 넘기고 비밀번호를 말하라"고 요구했고 이후 C씨가 안전벨트로 피해자를 조르는 과정에서 피해자가 C씨의 엄지손가락을 깨물어 핏자국을 차량에 남겼다. C씨가 목을 조를 때 B씨는 피해자가 반항하지 못하도록 피해자의 다리를 붙잡았다. 이들은 의식을 잃은 피해자를 갱티고개로 옮겨 살해한 후 시신을 유기했다. 차를 본래 주차돼 있던 초등학교 뒤편 담벼락에 가져다 놓은 둘은 차량에 남아있는 자신들의 지문을 모두 닦는 등 증거를 인멸한 뒤 ATM을 돌며 피해자의 돈을 인출했다.

2017년 11월 대전지법 천안지원은 강도살인 혐의로 기소된 이들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이들은 계획 범행이 아니라 우발 범행이었다고 항변했으나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지 않았다. 재판부는 경찰 수사 자료와 프로파일링 보고서를 증거로 채택, 계획 범행을 주장한 검찰의 손을 들어줬다. 프로파일링 보고서가 재판 증거로 채택된 것은 이 사건이 최초였다.

국내 프로파일러들은 이 사건을 "프로파일링은 거짓말 탐지기처럼 증거 능력이 없다는, 우리 스스로가 정해놓았던 한계를 스스로 깨부순 사건"이라고 평가한다. TF팀은 이후 4년간 50여건의 장기미제 사건의 프로파일링을 마쳤으며, 프로젝트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이승엽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저장이 취소 되었습니다.

프로파일러의 세계
한국일보가 직접 편집한 뉴스 네이버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뉴스스탠드에서 구독하기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