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건 지향'으로 살아 본 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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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건 지향'으로 살아 본 한 해

입력
2020.12.11 15:00
수정
2020.12.11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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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안경을 바꿨다. 시력이 나빠진 탓에 렌즈 도수가 전보다 높아졌다. 갑자기 바뀐 도수 때문에 어지러울지 모르니 조심하라던 안경점 사장님의 말을 기억하며 천천히 집을 향해 걸었다. 세상이 전보다 선명해지긴 했는데 이게 맞는 걸까 싶을 정도로 낯설고 어지러웠다. 차라리 흐린 눈으로 편하게 걷고 싶었다. 그래도 안경을 벗지 않았다. 며칠만 견디면 곧 이 낯선 세상에 적응할 테니까. 적응하고 난 뒤에는 그 동안 흐린 줄도 몰랐던 세상이 깜짝 놀랄 정도로 흐리게 느껴질 것이다.

잘 안다고 믿었던 세상이 갑자기 낯설어질 때가 있다. 뒤틀려 보이는 게 사실은 진짜였고, 진짜인줄로 믿었던 게 알고 보니 뒤틀린 거였다니. 살면서 이런 순간을 더러 마주한다. 안경 렌즈를 바꾼 것도 아닌데 말이다.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변할 때 우리는 어지럽다.

벌써 12월. 크고 작은 어지럼증을 겪으며 한해를 살았다. 그중 가장 큰 어지럼증은 ‘채식’이었다. 나는 올해 봄부터 비건 지향을 시작했는데 그전엔 소문난 ‘육식광’이었다. 과장이 아니라 실제 내가 육식을 좋아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어서 나를 아는 모두가 나의 비건 지향 선언에 무지하게 놀랐다. 가장 놀란 건 나 자신이지만. 어쨌든.


©게티이미지뱅크


육식 소비를 멈추니 세상이 전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일단 내 신념부터 보기 좋게 깨졌다. 나는 내가 육식 없이 살 수 없을 거라고 믿었다. ‘고기’를 먹지 않으면 내 몸이 비실비실해질까 봐 일부러 소며 돼지를 찾아 먹었다. 그런데 채식을 시작하니 몸이 먼저 바뀌었다. 집중력이 높아졌고 늘 더부룩했던 속이 가벼워졌다. 체지방이 줄었고 조금만 피곤해도 올라왔던 피부 트러블이 거의 사라졌다. 동물권 때문에 시작한 채식이었으므로 건강과 컨디션에 대한 기대는 전혀 하지 않았는데 뜻밖의 효과를 본 덕에 주변에 채식의 이로움을 조금 더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 기뻤다.

채식을 하기 전엔 인간의 삶을 영위하는 데 얼마나 많은 동물이 희생되는지 알지 못했다. (딱히 알려고 한 적도 없었다.) 동물성 재료가 쓰이는 음식과 물건들을 가능한 한 피하려고 노력하면서 이제야 조금 알게 되었다. 몰라서 소비해 왔던 논비건 제품들이 해도 해도 너무 많았다. 매일 바르던 로션은 잔인한 동물실험을 거쳤고 즐겨 먹던 과자에는 소고기맛 향신료가 첨가된다. 심지어 어떤 설탕은 정제 과정에서 ‘탄화골분’ 즉 숯으로 태운 동물의 뼈가 사용된다. 곡물과 물로 만드는 줄 알았던 술에도 논비건 제품이 있다. 일부 막걸리에는 소젖이 들어가고 논비건 맥주는 정제하는 과정에 젤라틴이나 물고기 부레풀 등 동물성 재료를 필요로 한다.

내가 쓰는 거의 모든 것에 동물의 죽음이 섞여 있었다. 그것들을 다 피하면서 살자니 삶이 고단해질 게 뻔했다. 모를 땐 그렇다 치더라도 알아 버린 이상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흐린 눈을 하며 동물의 희생에 감사하는 것으로 퉁치고 편하게 살 것인가, 동물을 사랑한다고 떳떳하게 말하며 좀 피곤하게 사는 사람이 될 것인가. 그런데 퉁친다는 것은 말이 안 됐다. 소위 ‘쌤쌤’이 되어야 하는데 나는 동물들에게 내어 줄 게 없었다. 최대한 안 먹고 안 쓰는 게 그나마 퉁치기에 가까운 삶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삶에 새롭게 씌워진 렌즈로 인한 어지럼증을 견디기로 했다.



강이슬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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