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5일, 8번 째 생일이 지난 몇 주 후 숨을 거둔 세라피나 해럴은 2012년 미국 사회에 ‘대리모 출산의 결정권’ 논쟁을 불러일으킨 당사자였다. 세라피나는 대리모였던 크리스털 켈리의 배 속에 있을 당시 선천적 질병이 발견됐고, 대리출산을 의뢰한 부부는 대리모에게 세라피나를 낙태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대리모가 1만 달러의 사례금을 거부하고 주(州)법에 따라 자신이 직접 아이의 친모가 될 수 있는 코네티컷주로 이주하면서 세라피나는 세상에 태어날 수 있었다.
한국에서 대리모 시술은 법적으로 금지돼 있진 않지만 상업적으로 허용돼 있지도 않다.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이라 암암리에 대리모 시장이 형성돼 있는 한국과 달리 전 세계 여러 국가에서 대리모는 엄연한 ‘산업’이다. 지난해 상업적 대리모 금지 법안이 하원을 통과하기 전까지만 해도 인도의 대리모 산업 규모는 연간 4억 달러(약 4,400억원)에 달했고, 러시아나 우크라이나 등에서는 십수개의 대리모 업체가 성업 중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 대리모 산업의 가장 큰 수요는 미국과 유럽, 혹은 중국의 부유한 부부들로부터 나온다.
여성의 신체를 식민지로 만드는 행위이자 노동의 외주화를 부추긴다는 반대 입장과, 난임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부부를 위한 이타적 행위라는 지지 사이에서, 대리모 논쟁은 쉽사리 결론 내기 어려운 현재진행형 문제다. 최근 출간된 조앤 라모스의 장편 ‘베이비 팜’은, 여성의 신체와 아이가 과연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이같은 첨예한 질문을 소설로 풀어낸 것이다. 지난해 미국에서 최초 발표돼 언론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은 소설로, 특히 필리핀 마닐라에서 태어나 여섯 살에 미국으로 이주한 작가 자신의 주변 경험이 잘 녹아 들었다.
소설의 배경은 뉴욕주 북부 한적한 전원에 자리잡은 ‘골든 오스크 농장’이다. 전담 의사와 간호사, 영양사, 트레이너들이 상주하는 최고급 리조트인 골든 오스크는 대리모들을 위한 시설이다. 일명 ‘호스트’로 불리는 대리모들은 이곳에서 9개월간 자신의 몸을 빌려주는 대가로 월급을 받고 마지막으로 건강한 아이를 출산하면 거액의 보너스까지 받는다.
단순히 ‘건강한 자궁’만 가져서는 호스트가 될 수 없다. 이곳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것은 ‘필리핀 여자’다. 그들은 “영어를 잘하는데다 성격이 유순하고 남을 위해 봉사하는 성향을 갖고 있어서” 의뢰인들에게 인기가 높다. 주인공인 제인은 이 조건에 정확히 부합하는 대리모다. 20대의 필리핀 이민자이자 어린 딸을 키우는 싱글맘으로, 오로지 딸을 제대로 키우겠다는 일념 하나로 골든 오스크에 입소한다.
제인이 가난한 필리핀 이민자라는 설정은 대리모 논쟁의 가장 첨예한 지점을 상징한다. 바로 대리모 대부분이 생모들보다 사회경제적으로 낮은 계층이며, 때문에 아무리 막대한 대가가 주어진다 해도 본질적으로는 식민지성을 띠고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평균 10만달러에 달하는 국내 대리모 출산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 제3세계 국가 출신을 통해 아이를 얻는다.
그렇다면, 대리모가 이민자 출신이 아니고, 의뢰인들과 계급적 차이가 없으며, 불가피한 이유로 임신이 불가능한 의뢰인을 위해 지원한, 선의와 자부심, 공명심 등을 갖춘 여성이라면 대리모는 문제적이지 않은 것일까? 레이건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만들어진 인물이다. 부유한 부모 밑에서 자랐으며 명문 듀크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한 백인 여성으로, 난임 여성을 도움으로써 무의미한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는 이상주의적 욕구로 대리모 일을 받아들인다.
베이비 팜
- 조앤 라모스 지음
- 김희용 옮김
- 창비 발행
- 612쪽ㆍ1만6,800원
소설은 제인과 레이건을 비롯해, 대리모들을 ‘스카웃’하는 아테, 골든 오스크의 총괄 책임자인 메이 등 다양한 여성 인물의 각자의 사정을 교차시키며 대리모 산업을 둘러싼 욕망을 해부한다. 남성 등장인물은 이 문제의 바깥에서 관조하거나 아예 배제된다. 이 같은 형식은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등 기존의 비슷한 페미니스트 디스토피아 작품들이 취해온 남성성과 여성성의 대립에서 벗어나는 시도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왜 임신과 출산은 늘 여성들만의 고민, 혹은 문제인가? 라는 의문을 의도치 않게 강화하는 설정처럼 느껴지게도 만든다. 이야기 말미, 이 모든 일의 근원이었던 ‘위대한 모성애’는 결국 해결책으로도 기능한다. 소설 내내 강조되는 인물들의 강렬한 ‘모성애’가 오히려 문제의 본질을 흐리게 만드는 것처럼 느껴졌다면, 그건 비출산 독자의 삿된 심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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