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선설이 옳을까, 성악설이 맞을까. 인류의 오랜 논쟁은 인간의 극단적인 이중성 앞에서 종종 길을 잃게 된다.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른 범죄자가 평소엔 친절하고 착한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될 때가 그렇다. 히틀러는 동물을 몹시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캄보디아 국민의 4분의 1을 죽인 학살자 폴 포트는 지인들에게 부드럽고 친절한 프랑스 역사 선생님이었다.
범죄자의 선한 면모를 밝히는 건 범죄를 합리화할 우려가 있어 대체로 금기시된다. 하지만 동물학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이 가장 악한 종인 동시에 가장 선한 종이라는 역설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선함의 역설’이라는 원제의 ‘한없이 사악하고 더없이 관대한’에서 미국 하버드대 인간진화생물학과 리처드 랭엄 교수는 이처럼 모순적인 인간의 본성에 담긴 수수께끼의 해답을 찾아 나선다.
저자는 성선설이나 성악설 같은 소모적 논쟁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일단 우리가 선천적으로 착한 동시에 악하다는 것을 받아들인 뒤 이처럼 이상한 조합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찾아보자고 제안한다. 추론의 방법론은 주로 진화론에 근거한 동물학이다. 여기에 신경생리학, 뇌과학, 해부학, 생화학, 고생물학, 고고학, 근대 사회사상, 심리학, 인류학, 형법학 등을 아우르고 수많은 학자들의 가설, 주장, 연구 결과 그리고 역사적 사례를 끌어와 인류 진화의 역사를 재구성한다. 대부분 일반 독자가 독해 가능한 수준이지만 신경능선세포, 세로토닌, MAOA 유전자처럼 전문 용어가 자세히 이어지는 부분에선 잠시 멈칫할 수도 있다.
인간의 모순적 본성이 어디서 오는지 파악하려면 공격의 두 가지 종류인 반응적 공격과 주도적 공격부터 구분해야 한다. 타인의 욕설이나 공격에 즉각적이면서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전자라면, 치밀하게 계획된 살인, 테러, 전쟁 등은 후자에 해당한다. 침팬지와 늑대는 두 종류의 공격성을 비슷하게 드러내지만, 인간만은 유독 반응적 공격성이 감소하는 반면 주도적 공격성이 증가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저자는 침팬지와 보노보 비교를 비롯해 여러 동물의 사례에서 인간의 반응적 공격성 감소 과정을 유추한다. 외양으로는 한눈에 구분하기 쉽지 않은 침팬지와 보노보는 콩고에서 강을 사이에 두고 기후, 토양, 산림 유형이 비슷한 지역에서 서식하는데도 성격은 전혀 딴판이다. 침팬지는 같은 집단의 구성원을 언제라도 때려 죽일 만큼 공격적이지만, 보노보는 그보다 훨씬 유순하고 관대하다. 두 종 간에는 실제 큰 차이가 있다. 보노보와 달리 침팬지는 한정된 먹이를 놓고 덩치가 훨씬 큰 고릴라와 경쟁해야 했다. 평화로운 환경에 살면서 보노보는 스스로 길들여진 것이다.
저자는 침팬지와 보노보의 상반된 진화 과정이 인간의 양면성을 설명해줄 것이라 기대한다. 인간도 신과 같은 외부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길들여졌을 거란 생각이다. 그는 다윈의 ‘사형 가설’을 끌어들인다. 반사회적이며 공격적인 유전자를 꾸준히 제거하다 보니 덜 공격적이고 도덕적인 행동이 퍼지는 경향이 생겼을 거란 추측이다.
여기에 언어 능력의 발달은 소문을 내거나 음모를 꾸미는 방식으로 공격적인 자를 배제하거나 배척하는 연합을 형성할 수 있도록 도왔을 것이다. 비판에 대한 감수성도 자기 길들이기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인류를 진화시켰을 가능성이 있다. 인간들이 연합해 사형 같은 주도적 공격을 하게 되면서 집단을 지배하던 힘은 한 명의 권력자가 아닌 남성들의 연합이 차지하게 됐다.
랭엄 교수는 인간 본성의 모순이 주도적 공격에서 비롯했을 것이라고 본다. 주도적 공격성은 인간을 더 차분하고 온화한 방향으로 이끌었지만, 한편으론 인간을 더욱 악하게 만들었다. 개인들이 합심해 공격하는 주도적 연합 공격의 극단적 형태는 전쟁이다. 이 같은 인간 고유의 능력은 우리 사회가 다른 종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난폭한 계층적 사회관계를 만들도록 이끌었다.
저자는 “진화가 어떻게 인류를 최고이면서 최악의 종으로 만들었는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쓴 것이지 “어떻게 끝나는지 말하는 것”이 목표는 아니라고 말한다. 인류의 진화 과정을 파악한다고 해서 미래를 점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의 지적처럼 권력 지향적인 인간 사회는 쉽게 부패할 수 있고, 평등하고 폭력이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협력은 얼마든지 악해질 수 있기에 그리 좋은 대안이 아닐 수 있다.
랭엄 교수는 "군사주의 철학의 발흥, 지나치게 낙관적인 평화주의의 확산, 권력의 남용을 억제하기 위한 강력한 제도와 참여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평화로워 보이는 지금이 가장 위험한 때일 수도 있다. 그러니 "조직적 폭력을 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감소시켜야 하는 어려운 도전을 위해 우리는 머리를 맞대야 한다. 그 지난한 과정에 저자의 분석이 유용한 통찰을 제공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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