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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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최경환은 부총리에 취임해 경제정책방향을 발표했다. 큼직한 활자 46쪽 자료에 ‘창조경제’가 20회 쓰여, '예산'(14회) '거시'(11회) 등 기존 빈출 단어를 압도했다. 창조경제는 박근혜 정부의 ‘혼’이었다.
창조경제를 선해하자면 ‘창의와 혁신을 통한 경제구조 개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개념을 국민에게 이해시키지 못했고, 정책 수단은 창조적이지 못했다. 어디에나 활용하는 마법의 단어였으나, 구조를 개혁하는 용도가 아닌 외형을 포장하는 용도로 쓰였다. 결국 정권만 사용하는 외계어가 됐다.
창조경제의 진짜 문제는 그 모호함이 아니라 그것이 비선의 농단이나 정권의 악행을 숨기는 가림막으로 활용된 점이다. 창조경제로 분칠한 장막 뒤에서 청와대는 기업의 돈을 뜯었고, 정권 치부를 겨눈 수사를 막았다.
불행히도 역사는 반복되는 중이다.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는 문재인 정부의 검찰개혁이다. 검찰개혁은 창조경제의 흑화 과정을 답습 중이다.
이 정부 초기만 해도 검찰개혁이 가리키는 방향은 선명했다. ‘정권과 결탁했던 검찰이 정치의 영향을 받지 않고 공정한 수사를 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전직 대통령 2명을 단죄하며 전 정권 수사를 끝낸 검찰이 칼날을 현 정권으로 돌리자, 돌연 검찰개혁의 개념이 변질됐다.
조국ㆍ울산시장ㆍ원전 수사를 거치며, 여권은 ‘정치에서 독립된 검찰’이 아니라 ‘정권을 손대지 않는 검찰’을 원하기 시작했다. 조국 수사는 인사권에 대한 도전으로, 원전 수사는 국정과제에 대한 방해로 규정됐다. 검찰의 시스템을 바꾸는 제도개혁이 아닌, 특정인을 몰아내는 인적청산이 개혁의 본령이 됐다. 1주택자만 중용한다던 청와대가 강남 2주택자를 법무차관으로 선택한 것은, 윤석열 제거가 부동산 안정보다 더 급한 발등의 불임을 스스로 증명한 사례다.
창조경제처럼 개념의 변질과 모호화 과정을 거치며, 검찰개혁도 본질과 현상 간에 큰 괴리를 노출했다. 여기저기 검찰개혁 구호는 난무하지만, 이제는 저마다 의도에 따라 검찰개혁을 달리 해석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검찰개혁을 이용하는 ‘구호의 소비행위’만 남았다.
여권은 검찰개혁으로 지지층을 소집하고, 결집한 지지층은 “그래서 검찰개혁에 반대한다고?”라며 사상검증을 한다. 개념이 산으로 가다 보니 범법자가 검찰개혁을 외치며 수사의 부당함을 호소한다.
청와대는 “지금껏 권력형 비리는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앞선 두 대통령도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 “가족이 없으니 국민만 생각한다”고 했던 이들이었다. 권력은 자정(自淨)할 수 없고, 스스로를 객관화할 수 없다는 사실을 역사는 매번 증명했다. 여권의 그림대로 검찰개혁이 달성되면, 자정과 객관화는 봉쇄된다. 수사에 대한 정권의 태도가 이럴진대, 공수처가 생긴들 검찰보다 잘 파헤칠 리가 없다.
이제 검찰개혁은 창조경제의 마지막 모습까지도 완벽하게 닮아갈 것인지 기로에 서 있다. 박근혜가 창조경제를 강조할 때처럼 권력이 농단과 치부를 숨길 목적으로 특정 구호에 집착한 게 아닌지를 검증할 시점이 올 것이다.
첫 검증의 계기는 대전지검의 원전 수사가 될 가능성이 높다. “어떻게 감히 대통령 공약을 건드리느냐”는 왕조시대 발상. 논리로 설명하기 어려운 이 과민반응을 이해할 수 있는 때가 올 수도 있다.
이영창 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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