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쓰여진 한 편의 시는 시대를 날카롭게 벼리고, 어디서도 위로 받은 적 없던 깊숙한 내면을 마치 들여다본 양 어루만진다. 그래서 시는 널리 읽히고, 오래 살아남고, 자연스레 외워진다. 책은 낡을지라도 시는 낡지 않는 이유다. 그 중에서도 ‘첫 시집’은 시인이 세상에 건넨 첫 번째 인사이자 한 세계의 탄생을 알리는 선언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이성복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가, 최승자의 ‘이 시대의 사랑’이, 장정일의 ‘햄버거에 대한 명상’이, 모두 ‘첫 시집’으로 세상에 나와 그대로 불멸의 생명력을 얻은 것들이다.
최근 비슷한 시기 기획된 '문학동네포에지’와 창비 ‘시작:하는 사전’은 각각 다른 시대 시인들의 ‘첫’을 만나볼 수 있는 시집이다. 어느덧 문단의 중견 혹은 원로가 된 시인들의 처음과, 이제 막 시작하는 시인들의 처음을 비교해 읽어볼 수 있다.
문학동네 ‘포에지’는 복간 시집 시리즈다. 1996년 11월 황동기 마종기 강은교 등 원로들의 청년기 시집을 복간했던 ‘포에지 2000’시리즈를 24년 만에 리부트 한 것이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절판됐던 구간들을 새롭게 조명한다는 취지다. 문학동네뿐만 아니라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시집들도 가리지 않고 포함했다.
1차로 출간된 복간시집은 진수미 ‘달의 코르크 마개가 열릴 때까지’, 성미정 ‘대머리와의 사랑’, 함민복 ‘우울씨의 일일’, 성석제 ‘낯선 길에 묻다’, 박정대 ‘단편들’, 김사인 ‘밤에 쓰는 편지’, 김언희 ‘트렁크’, 유형진 ‘피터래빗 저격사건’, 이수명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 박상수 ‘후르츠 캔디 버스’까지 모두 열 권이다. 이어 2차분으로 이문재 안도현 김민정 이영주 시인 등 열 명 시인의 시집이 출간될 예정이다. 모두 시인들의 첫 시집이다.
창비의 ‘시작:하는 사전’은 이제 막 기지개를 켠 신인들의 생동하는 처음을 만나볼 수 있는 책이다. 지난해 창비의 ‘문학3’ 웹페이지에서 선보였던 시 연재 ‘시작하는 사전’을 단행본으로 출간한 것이다. 연재 당시 첫 시집을 내지 않은 신인 시인 스물 네 명이 신작시 두 편과 함께 각 시의 키워드가 된 단어를 꼽고 그 단어를 시인만의 신선한 시각으로 다시 정의 내린 기획이다.
가족, 고양이, 금요일, 노래, 눈사람, 미래, 부고, 살갗, 일몰, 주머니, 파자마, 풍선 등 우리가 평소 익숙하게 사용했던 단어들은 시인의 손끝에서 새롭게 정의된다. 김지연 시인에게 ‘가족’은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주어지는 시간의 이름”이고, 강지이 시인에게 ‘나뭇가지’란 “하늘에 피어난 산호”다. 홍지호 시인에게 ‘노래’란 “잊지 않을 거라는 거짓말”이고, 남지은 시인에게 ‘몸’이란 “목격자이자 증언자”다. “당신의 시는 어떤 단어에서 시작하나요”라는 질문에 대한 시인들의 답은 곧, 왜 시가 영원히 새롭게 태어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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