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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이야기를 삶에 남길 것인가

입력
2020.12.03 14:45
수정
2020.12.03 18:06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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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동선
장동선뇌과학 박사

편집자주

그 어느 때보다 몸의 건강과 마음의 힐링이 중요해진 지금, 모두가 좀 더 행복해지기 위한, 넓은 의미의 치유를 도울 수 있는 이야기들을, 자연과 과학, 기술 안에서 찾고자 합니다.


1953년 10월, DNA의 2중 나선 구조 모형을 발견한 왓슨과 크릭 박사. 이들은 이 업적으로 196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https://digitalcommons.rockefeller.edu/transforming-principle-dna/23/)

1953년 10월, DNA의 2중 나선 구조 모형을 발견한 왓슨과 크릭 박사. 이들은 이 업적으로 196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https://digitalcommons.rockefeller.edu/transforming-principle-dna/23/)


삶 속에는 여러 이야기가 있다.

'모든 생명을 구성하는 이야기'는 유전자의 형태로 염색체의 이중나선 위에 쓰여 있다. 어떠한 이야기도 세상 속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몇 가지가 필요하다. 이야기가 저장되어 있을 곳, 이야기를 들어주고 다른 이들에게 퍼뜨려줄 전달자, 그리고 그 이야기를 손에 잡힐 수 있게 현실 속에 구현해 낼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세포에서는 세포핵 안 DNA에 이야기가 저장되어 있다. 이곳에서 들은 이야기를 다른 이들에게 전달해주는 일은 RNA, 이야기를 토대로 단백질을 생산하는 일은 리보솜이 한다. 서로 다른 유전자들이 만나면 자기 이야기를 우선적으로 남기고자 하는 생존의 싸움이 일어난다. 결국 더 설득력 있는 이야기가 살아남고, 경쟁에서 살아남은 이야기만이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

'유전자와 관련된 이 이야기'는 두 과학자의 뇌 안에서 탄생했다. 생명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 단위의 이야기가 G, T, A, C 단 네 개의 코드로 DNA 위에 이중나선 형태로 쓰여 있다는 원리를 밝혀낸 왓슨과 크릭 박사의 뇌다. 과학자의 뇌 안에서 이야기는 어떻게 생겨날까.


DNA의 2중 나선 구조를 밝힌 왓슨과 크릭 박사의 Nature 논문 초판. ⓒWatson, J.D. & Crick, F.H.C, Molecular Structure of Nucleic Acids, Nature, October, 1953.

DNA의 2중 나선 구조를 밝힌 왓슨과 크릭 박사의 Nature 논문 초판. ⓒWatson, J.D. & Crick, F.H.C, Molecular Structure of Nucleic Acids, Nature, October, 1953.


과학자는 새로운 발견을 하는 사람이다. 새로운 발견을 한다는 것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완벽한 어두움 속으로 한 걸음씩 내디디는 모험을 하는 것과 같다. 내 앞으로는 길이 보이지 않지만, 여러 실험을 하면서 없는 길을 찾아간다. 이때, 과학자 역시 가설이라고 부르는 하나의 이야기에 의지한다.

이야기란 본질적으로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점들의 정보를 하나로 이어주는 선과 같다. 하늘의 별들이 이어져 마차와 전갈, 큰 곰과 작은 곰의 자리로 보이는 것처럼, 선들을 잘 이어가면 그림이 된다. 우리가 별들 하나하나의 위치를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별자리는 기억하는 것처럼, 뇌는 세상을 점들로 이해하지 않는다. 점들을 이어주는 선을 찾아 그림을 그린다. 점들이 팩트 기반의 정보라면, 그림은 이야기다. 그래서 뇌는 세상을 팩트로 기억하지 않고 이야기로 기억한다.

과학자는 그림을 찾아가기 위해 선으로 이어질 점들을 찾는 사람이다. 다음 점이 어디에 있는지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디디기 위해서는 선이 있고 그림이 존재한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점을 찾기도 전에 그려보는 그림이 바로 가설이다.

과학자의 가설 역시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함께 어둠 속을 탐험할 다른 과학자들도, 탐험을 지원해주는 연구비 투자자도 나타난다. 왓슨과 크릭은 뛰어난 이야기꾼들이기도 했다. 과학자의 가설이 하나의 이야기로 설득력이 없으면 그 길은 혼자 걷기 어려운 길이 된다.

사실은 우리 모두 우리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삶은 결국 어떠한 이야기를 남길 것인가의 싸움이다. 누군가 나의 이야기를 온전히 들어줄 사람이 한 명만 있어도 나의 삶은 살 가치가 있다. 그런데 모두가 각자 나의 이야기만 하며 서로 다른 이의 이야기는 들어주지 않는다면, 삶은 보다 각박해지지 않을까?

한 개그맨이 한동안 공황 장애로 활동을 멈춘 적이 있었다. 무대에서 내려오는데 두 중학생이 하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헐, 지가 웃긴 줄 아나 봐." 그 말의 상처는 몇 년을 갔다고 한다.

사람을 죽이는 이야기가 있고, 사람을 살리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우리 안에 그리고 다른 사람 안에 어떠한 이야기를 남길까 잘 고민해야 한다. 바이러스의 유전자가 자기 이야기를 우선적으로 남기게 되면 생명체는 죽는다. 우주 안에는 별보다 어두움이 압도적으로 많이 존재하지만, 우리는 어두움이 아닌 별을 본다.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될 수 있게 연결하는 그림을 우리 함께 그려볼 수 없을까?

드라마 '왕좌의 게임' 속 주인공 티리온 라니스터는 이런 명대사를 남겼다:

"무엇이 사람들을 연결하는가? 군대도, 황금도, 깃발도 아니다. 이야기다. 세상에서 좋은 이야기보다 힘이 센 것은 없다."

장동선 뇌과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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