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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은 시대를 담는 공간…무대는 계속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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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은 시대를 담는 공간…무대는 계속돼야 한다”

입력
2020.12.03 05:0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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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창극단 ‘트로이의 여인들’ 연출가 옹켕센

국립창극단 작품 '트로이의 여인들'을 연출한 싱가포르 출신 연출가 옹켕센은 "서로 다른 문화 예술이 만나 협업할 때는 차이점에서 발생하는 긴장과 충돌을 포용해 창조적으로 발전시켜 가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왕나경 인턴기자

국립창극단 작품 '트로이의 여인들'을 연출한 싱가포르 출신 연출가 옹켕센은 "서로 다른 문화 예술이 만나 협업할 때는 차이점에서 발생하는 긴장과 충돌을 포용해 창조적으로 발전시켜 가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왕나경 인턴기자

“창극이 세계에서 통할 수 있다는 것을 한국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반드시 와야만 했습니다.”

창극에 대한 자부심, 판소리를 향한 애정이, 한국 사람 못지않다. 아니, 훨씬 뜨겁다. 싱가포르 출신 세계적인 연출가 옹켕센(57)이 코로나19를 뚫고, 2주 자가격리까지 감수하면서, 기꺼이 한국행 비행기에 오른 이유다. 그가 연출을 맡은 국립창극단의 ‘트로이의 여인들’은 3~10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무대에 오른다. 최근 국립극장에서 마주한 옹켕센은 “어떤 상황에서도 작품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창착자의 의무”라고 말했다.

옹켕센은 동ㆍ서양의 전통예술을 한 무대에 담아내면서도 본연의 미학을 살리는 데 탁월하다는 평을 받는다. 중국 경극과 일본 가부키의 형식미를 활용한 ‘리어’ ‘리처드 3세’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한국 전통예술에 대한 이해도 깊다. 1998년 첫 방문 당시 사물놀이, 만신 김금화의 굿판, 창극 ‘춘향전’ 등을 접한 이후 한국 예인들과 꾸준히 교류해 왔고, 프랑스에서 공연한 ‘리어 드리밍’에 정가 명창 강권순을 세우기도 했다.

‘트로이의 여인들’도 같은 맥락 위에 있다. 전쟁에서 패해 노예로 전락한 트로이 여인들의 가혹한 운명을 다룬 이 작품에선 고대 그리스 비극과 한국 판소리가 시공간을 뛰어넘어 조우한다. 창작진도 전통과 현대를 아우른다. 명창 안숙선이 작창을, 영화 ‘기생충’ 음악감독 정재일이 작곡을, 극작가 배삼식이 극본을 맡았다. 싱가포르예술축제, 런던국제연극제, 홀란드페스테벌, 빈페스티벌 등 세계 무대에서도 “관객을 사로잡는 압도적인 비가”라는 찬사를 받았다.

치장을 걷어낸 단순하고 간결한 미장센이 배우들의 '소리'에 더욱 집중하도록 이끈다. 국립극장 제공

치장을 걷어낸 단순하고 간결한 미장센이 배우들의 '소리'에 더욱 집중하도록 이끈다. 국립극장 제공

옹켕센은 “판소리에선 인간 목소리가 지닌 가장 자연스러운 힘이 느껴진다”고 했다. 그래서 창극의 핵심인 ‘소리’ 이외의 요소를 최대한 걷어내고 판소리의 본령으로 돌아갔다. “창극을 처음 접했을 때 혼란스러웠어요. 오페라, 뮤지컬, 음악극이 뒤섞여서 달고 시고 짜고 여러 맛이 났죠. 본질을 찾기 위해선 오랜 시간 창극에 덧입혀진 장식을 제거해야 했어요. 집의 골격을 살리기 위해 벽에 겹겹이 발린 페인트를 벗겨내듯이요.”

소리꾼 한 명과 고수 한 명이 호흡을 맞추는 판소리처럼, 각 캐릭터마다 그를 대변하는 악기 하나와 짝을 이뤄 극을 이끌어 가도록 했다. 트로이의 왕비 헤큐바는 거문고, 공주 카산드라는 대금, 왕자비 안드로마케는 아쟁이다. 특히 눈에 띄는 캐릭터는 헬레네다. 적국 스파르타의 왕비로 전쟁의 씨앗이 된 헬레네는 국악기가 아닌 피아노와 노래한다. 심지어 배우는 ‘남자’ 소리꾼 김준수다. “헬레네는 사랑을 찾아 남편을 버리고 트로이로 건너와요. 자기 감정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현대적인 인물이기도 하죠. 비극을 잉태한 이방인으로서 헬레네의 역할을 부각하고 싶었습니다. 그러기 위해 등장과 동시에 이질감이 느껴지길 바랐고, 제 선택은 김준수였죠. 창법도 음악도 많이 다를 겁니다.”

2016년 '트로이의 여인들' 공연 당시 헬레네를 연기한 소리꾼 김준수(왼쪽)와 음악감독 정재일. 국립극장 제공

2016년 '트로이의 여인들' 공연 당시 헬레네를 연기한 소리꾼 김준수(왼쪽)와 음악감독 정재일. 국립극장 제공

트로이 여인들은 정복자들에게 끝까지 저항한다. 이를 통해 극은 약자의 시선에서 전쟁의 야만성을 고발하는 동시에 그들을 희생자가 아닌 생존자로 재조명한다. 옹켕센은 2016년 초연 당시 기억을 하나 꺼냈다. 숙소가 일본대사관 인근 호텔이라 극장을 오가며 날마다 평화의 소녀상을 만났다. 그 앞에선 대학생들이 소녀상을 지키려고 노숙 투쟁 중이었다. 그는 “그때 느낀 감정들이 자연스럽게 극에 녹아 든 것 같다”며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는 다른 문화권 여성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이야기이기도 하다”고 했다.

코로나19 시대, 트로이 여인들의 강인한 생존 의지는 더욱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팬데믹은 우리가 겪는 구체적 사건이지만, 넓게 보면 수천 년 역사의 지층에 쌓여 있는 먼지에 불과할 수도 있어요. 그 먼지를 털어내면 궁극적으로 남는 건 개인과 권력 간의 문제예요. 트로이 여인들은 신까지 포함해서 자신을 억압하는 모든 권력에 맞서요. 그러면서 가장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이라는 걸 깨닫죠. 그래서 지금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지, 이 작품을 통해 질문하고 싶었습니다.”

연출가 옹켕센은 "코로나19 이후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대안을 모색해야 할 때"라며 "언젠가 연극을 통해서 그 고민을 풀어내고 싶다"고 말했다. 왕나경 인턴기자.

연출가 옹켕센은 "코로나19 이후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대안을 모색해야 할 때"라며 "언젠가 연극을 통해서 그 고민을 풀어내고 싶다"고 말했다. 왕나경 인턴기자.

옹켕센은 “연극은 시대의 거울, 극장은 기억하는 공간”이라고 했다. 무대가 멈추어선 안 되는 또 다른 이유다. “한국 사회를 변화시켜 온 한국 여성들의 힘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더욱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모든 공연의 마지막 배우는 바로 관객입니다. 무대와 객석이 절실하게 만나 하나가 되는, 소중한 순간을 선물해 드리고 싶습니다.”

김표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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