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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뉴스보다 위험한 그 '소리'

입력
2020.11.27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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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진위와 상관 없는 허튼소리로 지지자들을 끌어모으는 데 일가견이 있는 인물이다. 워싱턴=A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진위와 상관 없는 허튼소리로 지지자들을 끌어모으는 데 일가견이 있는 인물이다. 워싱턴=AP연합뉴스

“맞벌이하시는 경우 어린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지 않아서 항상 미안하시죠. 이럴 때 방법이 있어요. 엄마가 어린애들 일어나는 새벽 6시부터 45분 정도를 같이 놀아 주는 것이에요.”

혜민스님이 8년 전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올려 비난받은 글이다. 사과와 함께 잊혔던 그의 망언은 ‘무소유가 아닌 풀소유’ 논란이 일자 다시 소환됐다. 이런 발언과 언행 불일치는 수많은 소비자에게 가짜 상품을 샀다는 배신감을 느끼게 했다.

300만부 이상 팔린 그의 에세이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은 달콤한 격언으로 가득하다. 조건을 보고 사랑하면 그 때문에 헤어지게 되니 “사랑은 ‘무조건’으로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식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좋은 말’이란 점에서 ‘맞벌이 엄마’ 망언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이처럼 진실과 거짓을 넘어선 수사법은 좋은 의도라도 현실을 왜곡시킬 수 있다.

최근 가짜뉴스 문제가 화두로 떠오르고 있지만 일각에선 '개소리(bullshit)'가 그보다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미국 철학자 해리 프랑크퍼트의 ‘개소리에 관하여(On Bullshit)’를 비롯해 최근 국내 출간된 영국 저널리스트 제임스 볼의 ‘개소리는 어떻게 세상을 정복했는가’까지 개소리 혹은 헛소리의 위험성을 짚는 책들도 여럿 나와 있다.

개소리는 '속이 없고 미덥지 아니한 말'이란 사전적 의미의 헛소리나 함부로 지껄이는 허튼소리와 유사한 개념이다. 그러나 '개소리에 관하여'의 역자가 굳이 비속어인 '개소리'로 옮긴 건 단순히 무의미한 말이라는 뜻의 'nonsense'로 이해될 수 있는 헛소리와 달리 'bullshit'에는 화자의 숨은 의도가 있다는 저자의 논지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프랑크퍼트는 거짓말과 다른 개소리의 본질을 “사태의 진상이 실제로 어떠한지에 대한 무관심”이라고 봤다. 그래서 그는 "거짓말보다 훨씬 큰 진리의 적"이라고까지 했다. 거짓말쟁이는 의도적으로 진실을 숨기거나 왜곡하지만, '숨은 의도'를 지닌 헛말쟁이들은 진위 자체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영국 철학자인 스티븐 로가 '왜 똑똑한 사람들이 헛소리를 믿게 될까'에서 지적했듯 과학적 근거도 없는 헛소리는 종종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까지 '지적 블랙홀'로 끌어들인다.

헛소리 혹은 개소리는 가짜뉴스보다 몇 배 솔깃하다. 분별 있는 사람도 최소한 ‘불쾌한 흥미’를 느낀다. 그래서 유튜브와 소셜미디어는 물론 뉴스에서도 흡착력이 강하다. 얼토당토않은 발언을 그대로 옮기며 독자들을 유인했던 적이 여러 차례 있던 입장에선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다.

망언을 막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개소리와 거짓말, 단순 오류의 경계가 희미한 경우도 적지 않다. 손쉬운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진실을 무의미하게 만들려는 시도를 방관할 수만은 없다. 가짜뉴스와 개소리를 단지 팩트 검증 기사에만 맡겨놓는 건 너무 소극적인 방안이다.

각종 헛말과 거짓이 진실을 덮어버리지 않도록 언론은 진지한 반성과 함께 신뢰도를 높일 방안을 찾아야 한다. 독자들도 좀 더 적극적으로 언론과 소셜미디어를 감시해야 한다. 견해가 다른 매체나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소통하려 할 필요도 있다. 볼의 제안처럼 학교에서 미디어 문해력을 가르치는 것 역시 장기적으론 도움이 될 듯하다. 정보 생태계의 주체들이 다각도로 움직여야 한다. 자정 능력에 기대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




고경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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