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성 폐쇄, 보좌진 ‘과잉 충성’이 더 문제
울산선거 개입 대통령 의중 영향 미친 듯
무심코 한 말, 두고두고 족쇄 될 가능성
수백 쪽 분량의 월성1호기 감사원 보고서를 훑어보다 보면 한 대목에 시선이 쏠린다. 월성1호기 폐쇄 결정의 근저를 짐작하게 하는 내용이다. 2018년 4월 2일 청와대 보좌관이 월성1호기 외벽 철근 노출 사실을 보고망에 띄우자 문 대통령이 “언제 가동을 중단하느냐”고 물었다고 보고서에는 기술돼 있다. 이런 내용이 청와대 비서관을 통해 산업부장관에게 전달돼 이틀 만에 ‘즉시 가동 중단’으로 확정됐다는 게 감사원 판단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문재인 대통령의 한마디가 조기 폐쇄의 원인이라는 얘기다.
궁금한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당시 산자부 담당 과장은 “월성1호기는 조기 폐쇄하되, 원자력안전위의 영구 정지 허가가 나올 때까지 2년 6개월 더 가동할 필요가 있다”고 답했다고 한다. 당장의 안전성에 큰 문제가 없다면 ‘한시적 가동 중단’ 방안은 합리적 판단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장관이나 청와대 비서관은 문 대통령을 독대해 이런 내용을 설명했어야 했다. 문 대통령이 즉시 가동 중단을 지시한 것도 아닐 터인데 의견이 수용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지 않았을까 싶다.
월성1호기 폐쇄는 문 대통령의 공약이다. “선거를 통해 국민의 지지를 받은 정책을 수사하는 게 정당하냐”는 주장이 나오는 배경이다. 하지만 국민이 불법까지 승인한 건 아니다. 공약 이행도 적법한 절차를 따라야 한다는 건 당연한 이치다. 산자부 담당 과장이 말한 대로 합당한 절차를 따랐더라면 지금 같은 뒤탈은 나지 않았을 것 아닌가. 조기 폐쇄 회의 참석자 명단을 숨기거나, 문건을 대거 삭제하는 등 불법을 의식한 행동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수사가 중단된 상태인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 사건도 비슷한 모양새를 띠고 있다. 이 사건 공소장에는 대통령이란 단어가 15차례 언급돼 있다. 문 대통령이 직접적으로 연관된 단서는 제시하지 못하면서도 검찰이 대통령을 넣은 것은 정치적 의도로 해석된다. 후일을 기약하며 검찰이 남겨 놓은 일종의 ‘다잉(dying) 메시지’인 셈이다.
문제는 이 사건 역시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화근으로 작용했다는 점이다. 공소장에 적시된 ‘현직 대통령의 30년 지기’의 당선을 위해서라는 문구는 2014년 문 대통령이 울산 국회의원 보궐선거를 앞두고 “가장 큰 소망은 송철호 후보가 당선되는 것”이라며 지지를 호소한 사실을 연결시킨 듯하다. 청와대 비서실의 7개 부서가 선거에 개입했다는 검찰 수사가 사실이라면 평소의 문 대통령 의중을 알고 조직적으로 나섰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부산시장 보궐선거용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는 가덕도신공항 추진도 따지고 보면 문 대통령의 발언이 촉매제가 됐을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다. 지난 2월 부산 방문에서 문 대통령은 “영남권 광역단체의 뜻이 하나로 모아진다면 (신공항)결정이 수월해질 것”이라고 말했고, 그 후 신공항에 부정적이었던 정부의 기류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막강한 권력을 쥔 한국 대통령의 말 한마디의 무게는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무심코 던진 말이 엉뚱한 파장을 낳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문 대통령이 월성1호기를 빨리 폐쇄하라고 지시를 내렸거나, 송철호 시장을 어떻게든 당선시키라고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통령 주변 인물들의 ‘심기 경호’ 행태가 대통령에게 해를 미치게 된 형국이다.
지난 대선에서 촛불을 든 시민들이 요구한 것은 더는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좌지우지되는 권위주의 시대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 그런데 대통령과 집권 세력은 얼마나 달라졌는가. 문 대통령의 한마디가 두고두고 족쇄로 남지 않을까 심히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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