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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한마디

입력
2020.11.23 18: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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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재
이충재주필

월성 폐쇄, 보좌진 ‘과잉 충성’이 더 문제
울산선거 개입 대통령 의중 영향 미친 듯
무심코 한 말, 두고두고 족쇄 될 가능성


문재인 대통령이 22일 청와대 본관에서 포용적이고 지속가능한 복원력 있는 미래를 주제로 열린 사우디아라비아 2020 리야드 주요 20개국(G20) 화상 정상회의 2세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22일 청와대 본관에서 포용적이고 지속가능한 복원력 있는 미래를 주제로 열린 사우디아라비아 2020 리야드 주요 20개국(G20) 화상 정상회의 2세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수백 쪽 분량의 월성1호기 감사원 보고서를 훑어보다 보면 한 대목에 시선이 쏠린다. 월성1호기 폐쇄 결정의 근저를 짐작하게 하는 내용이다. 2018년 4월 2일 청와대 보좌관이 월성1호기 외벽 철근 노출 사실을 보고망에 띄우자 문 대통령이 “언제 가동을 중단하느냐”고 물었다고 보고서에는 기술돼 있다. 이런 내용이 청와대 비서관을 통해 산업부장관에게 전달돼 이틀 만에 ‘즉시 가동 중단’으로 확정됐다는 게 감사원 판단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문재인 대통령의 한마디가 조기 폐쇄의 원인이라는 얘기다.

궁금한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당시 산자부 담당 과장은 “월성1호기는 조기 폐쇄하되, 원자력안전위의 영구 정지 허가가 나올 때까지 2년 6개월 더 가동할 필요가 있다”고 답했다고 한다. 당장의 안전성에 큰 문제가 없다면 ‘한시적 가동 중단’ 방안은 합리적 판단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장관이나 청와대 비서관은 문 대통령을 독대해 이런 내용을 설명했어야 했다. 문 대통령이 즉시 가동 중단을 지시한 것도 아닐 터인데 의견이 수용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지 않았을까 싶다.

월성1호기 폐쇄는 문 대통령의 공약이다. “선거를 통해 국민의 지지를 받은 정책을 수사하는 게 정당하냐”는 주장이 나오는 배경이다. 하지만 국민이 불법까지 승인한 건 아니다. 공약 이행도 적법한 절차를 따라야 한다는 건 당연한 이치다. 산자부 담당 과장이 말한 대로 합당한 절차를 따랐더라면 지금 같은 뒤탈은 나지 않았을 것 아닌가. 조기 폐쇄 회의 참석자 명단을 숨기거나, 문건을 대거 삭제하는 등 불법을 의식한 행동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수사가 중단된 상태인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 사건도 비슷한 모양새를 띠고 있다. 이 사건 공소장에는 대통령이란 단어가 15차례 언급돼 있다. 문 대통령이 직접적으로 연관된 단서는 제시하지 못하면서도 검찰이 대통령을 넣은 것은 정치적 의도로 해석된다. 후일을 기약하며 검찰이 남겨 놓은 일종의 ‘다잉(dying) 메시지’인 셈이다.

문제는 이 사건 역시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화근으로 작용했다는 점이다. 공소장에 적시된 ‘현직 대통령의 30년 지기’의 당선을 위해서라는 문구는 2014년 문 대통령이 울산 국회의원 보궐선거를 앞두고 “가장 큰 소망은 송철호 후보가 당선되는 것”이라며 지지를 호소한 사실을 연결시킨 듯하다. 청와대 비서실의 7개 부서가 선거에 개입했다는 검찰 수사가 사실이라면 평소의 문 대통령 의중을 알고 조직적으로 나섰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부산시장 보궐선거용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는 가덕도신공항 추진도 따지고 보면 문 대통령의 발언이 촉매제가 됐을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다. 지난 2월 부산 방문에서 문 대통령은 “영남권 광역단체의 뜻이 하나로 모아진다면 (신공항)결정이 수월해질 것”이라고 말했고, 그 후 신공항에 부정적이었던 정부의 기류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막강한 권력을 쥔 한국 대통령의 말 한마디의 무게는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무심코 던진 말이 엉뚱한 파장을 낳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문 대통령이 월성1호기를 빨리 폐쇄하라고 지시를 내렸거나, 송철호 시장을 어떻게든 당선시키라고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통령 주변 인물들의 ‘심기 경호’ 행태가 대통령에게 해를 미치게 된 형국이다.

지난 대선에서 촛불을 든 시민들이 요구한 것은 더는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좌지우지되는 권위주의 시대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 그런데 대통령과 집권 세력은 얼마나 달라졌는가. 문 대통령의 한마디가 두고두고 족쇄로 남지 않을까 심히 우려된다.

이충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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