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가장 ‘연극적인’ 시기를 꼽는다면 언제가 마땅할까. 개인별 편차야 있겠지만 우리 모두는 청소년기라는 생의 가장 극적인 순간을 통과한다. 자각 없이 뛰놀던 어린 시절을 지나, 처음으로 인생이라는 무대의 주인공으로서의 자신을 인식하는 시기. 때로는 주인공으로서의 중압감에 짓눌리기도 하고, 극의 진행 방향도 스스로 결정해야만 하지만, 극의 최종 연출자이자 주인공으로서 자기 역할을 받아들이는 시기다.
수전 최의 장편 ‘신뢰 연습’은 삶이라는 연극을 수행 중인 청소년들을 진짜 무대로 불러들인 소설이다. 1980년대 한 시립 공연 예술 고등학교 연극과를 배경으로 무대 안과 바깥을 서성이는 14세~16세의 청소년들을 통해 그들이 통과하는 시기의 혼란과 열망을 극적으로 그려 낸다. 지난해 전미도서상 수상작으로, 한국계 미국인 작가 최초의 전미도서상 수상작이기도 하다(공교롭게도 19일 발표된 올해 전미도서상 역시 재일동포 작가 유미리(번역 문학 부문)와 재미교포 작가 최돈미(시 부문)에게 돌아갔다).
소설은 총 3부로 이뤄진다. 그중 1부는 세라와 데이비드라는, 서로에게 반한 열다섯 살의 연극과 학생 두 명의 사랑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전혀 다른 집안 환경과 재능을 가진 둘은 단숨에 서로에게 빠져들고, 이들의 사랑은 곧 연극반의 연기교사이자 정신적 지주인 킹슬리의 눈에 띄게 된다. 킹슬리는 두 사람에게 ‘신뢰 연습’이라 불리는 연기 연습을 시킨다.
같은 질문을 계속해서 서로에게 반복해 던지고,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서로를 신뢰하게 만드는 이 훈련을 통해 세라와 데이비드는 상처를 입고 헤어지게 된다. 이후 영국의 예술고등학교 연극팀이 학교를 방문하면서 세라는 영국 연극팀의 배우 지망생과 사귀게 되고, 세라와 데이비드의 한때의 열정은 씁쓸한 결말로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까지만 읽는다면 예민한 15세 소년 소녀의 연애담처럼 보이는 소설은, 캐런과 클레어라는 또 다른 여성 인물들이 화자로 등장하는 2부와 3부에서 극적인 반전을 맞이한다. 세라와 데이비드가 주인공이었던 1부에서 ‘조연’ 혹은 ‘단역’으로만 등장했던 캐런이 화자가 된 2부를 통해 독자는 1부의 이야기가 훗날 어른이 된 세라가 자신의 학창시절을 배경 삼아 쓴 소설의 일부라는 것을 알게 된다. 1부의 이야기가 작가인 세라가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으로 왜곡시킨 내용이라는 게 2부에서 밝혀지고, 캐런의 입장에서만 알 수 있는 새로운 사실이 거듭 등장하면서 독자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후 캐런은 유명 작가가 된 세라와 저명한 연극 연출가가 된 데이비드를 14년 만에 재회시키고, 이들을 모두 불러 모은 자리에서 과거의 복수를 감행한다. 그리고 시간이 더 흐른 뒤 3부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클레어라는 인물을 통해 독자들은 과연 이 모든 이야기에서 ‘믿을 만한 진실’이 무엇이며 ‘신뢰할 수 있는 화자’가 과연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 혼란까지가 정확하게 작가가 의도한 부조리극의 일부임을,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알게 된다.
소설에서 특히 주의 깊게 살펴야 하는 것은 청소년기의 성적 호기심과 합의에 관한 내용이다. 남교사가 어린 여학생을 대상으로 저지른 성추행을 두고 “우린 절대 어리지 않았어”라고 회상할 수 있는 남성(한때 소년이었던)과, “우린 어렸어”라고밖에 대답할 수밖에 없는 여성(한때 소녀였던) 사이의 간극을 통해, 작가는 여학생들이 충분한 어른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사람은 과연 누구인지, 여학생 자신인지 아니면 남성 어른인지, 묻는다. 그리고 이 믿음에는 어쩔 수 없이 성별과 권력의 차이가 개입할 수밖에 없다.
그 아이는 과연 정말 나를 사랑했을까? 그 교사는 과연 정말 좋은 교사였을까? 그 이야기는 과연 사실일까? 소설은 끊임없이 독자가 묻게 만듦으로써 연인 간, 친구 간, 학생과 교사 간, 배우와 감독 간, 마지막으로 소설 속 화자와 독자 간의 ‘신뢰’를 ‘연습’시킨다. 그리고 반복되는 연습 끝에 깨닫게 되는 진실은, 이 게임에서 완전무결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독자 자신마저도.
신뢰 연습
- 지은이 수전 최
- 옮긴기 공경희
- 발행 왼쪽주머니
- 분량 4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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