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동킥보드 역삼역 인도서 30분간 41대?
배달 오토바이도 제지 없이 진입해 주차??
내달부터 중학생도 타는데 학교 앞 무방비
"제한속도 낮추고 소음장치 장착토록 해야"?
이용자 "차도에선 '킥라니' 달릴 곳 달라"?
전문가 "속도 제한, 단속 강화 필요"
꽤 될 것으로 짐작은 했지만, 작정하고 세어 보니 예상을 뛰어 넘었다.
지난 5일 서울 강남구의 지하철 2호선 역삼역 1번 출구 앞 보도(인도). 오후 6시부터 30분간 기자가 인도 위를 지나가는 교통수단을 집계한 결과 전동 킥보드가 41대에 달했고, ‘따릉이’ 등 자전거(5대)와 오토바이(4대)도 보였다. 시선을 휴대폰에 고정시킨 보행자들과 여러 교통수단이 한 데 뒤섞여 금방이라도 충돌 사고가 날 듯한 아슬아슬한 장면도 여러 번 눈에 들어왔다. 이런 교통수단의 인도 주행은 불법이지만 단속하는 경찰은 없었다.
탈 것들은 인도와 횡단보도를 거침 없이 누볐다. 역삼역과 선릉역 사이 횡단보도에서는 보행자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자 신호 대기 중이던 배달 오토바이 3대와 전기 자전거 한 대가 보행자들과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려 했다. 그러다 정지선을 넘어 정차한 퇴근길 자동차들에 진로가 막히자 서로 경적을 울리며 신경전을 벌였다.
이처럼 테헤란로를 달리는 전동 킥보드는 보행자에게는 달리는 쇳덩이나 다름 없다. 젊은 연인 2명이 함께 올라탄 전동 킥보드는 출발한 지 얼마 안 돼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다가 마주 오던 노인과 부딪칠 뻔했다. 충돌을 간신히 피한 서해창(81)씨는 “저렇게 인도 위로 마구 달리니까 사고가 안 날수가 있냐”며 화를 내면서도 불안해했다.
이튿날인 6일 오후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 앞 널찍한 인도에서도 보행자들은 위험에 노출돼 있었다. 근처 차도에서 횡단보도를 통해 올라온 오토바이 여러 대가 인도 깊숙이까지 들어와 주차한 뒤 건물로 물건을 날랐다. 전동 킥보드의 경우 그나마 맞은 편에서 다가올 때는 피할 수 있지만, 뒤에서 접근할 때는 소리도 불빛도 없어서 기척을 느끼지 못한 보행자가 깜짝 놀라는 일이 적지 않았다. 2호선 잠실역과 석촌호수를 잇는 인도를 주행하던 등산복 차림의 남성은 야간 주행 때 쓰기 위해 자전거에 단 고성능 전조등을 한껏 치켜 올렸다. 보행자들은 눈이 부셔서 고개를 돌려야 했다.
보행자들이 위협 받는 현실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오토바이와 전동 킥보드 등의 교통수단이 별다른 제지 없이 인도를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국토교통부와 교통안전공단에 따르면 지난 5월부터 9월까지 ‘교통안전 공익제보단’의 오토바이 불법주행 신고 건수 중 법 위반으로 확인된 사례는 총 2만2,849건이다. 이중 인도 주행으로 적발된 건수만 3,908건(17.1%)에 달했다.
인도 위를 달리는 전동 킥보드가 너무 많다 보니, 주행공간이 차도가 아니라 인도라는 인식이 굳어졌다. 한국소비자원이 지난해 2월 전동 킥보드를 비롯한 개인형 이동장치(퍼스널 모빌리티·PM) 이용자 200명에게 물은 결과 이들 중 66.0%(복수응답 가능)가 인도에서 주행한다고 답했다. 반면 차도라는 답변은 46.0%에 그쳤다. 특히 내달 10일부터는 전동 킥보드 사용제한이 확 풀릴 예정이라 중학생도, 무면허자도 탈 수 있게 된다. 자전거도로(자전거·보행자 겸용도로 포함) 주행까지 가능해져 보행자와의 충돌 위험은 더 커진 셈이다. 보행자에게 가장 안전해야 할 인도가 가장 위험한 공간으로 변한 것이다.
PM 증가로 사고가 끊이지 않으면서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계속 나왔지만, 경찰청 등 당국은 이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론 악화에 뒤늦게 국회에서 규제 강화 법안들이 쏟아져 나오면서다. 경찰청 교통기획과 관계자는 "개정된 법이 시행되기 전에는 추가 규제를 검토하는 게 어려웠지만, 이제는 법안이 발의되고 있어 규제 신설 여부에 대해 재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초등학교 앞도 안전지대 아냐
그러나 당국의 이런 느긋한 태도는 커져가는 위험의 불씨를 방치한 채 요행을 바라는 것일 수 있다. 본보의 현장 확인 결과, 충돌 사고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어린이마저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도심과 대학가의 일부 초등학교 주변에도 전동 킥보드와 자전거가 인도 위를 질주했다.
4일 서울 양천구 목동의 한 초등학교. 등교와 직장인 출근이 겹치는 시간대인 오전 8시50분~9시20분 학교 앞 인도를 지나간 자전거는 총 6대였고, 이따금 전동 킥보드도 보였다. 40대 남성 학부모는 전동 킥보드에 딸을 태운 채 인도를 주행해 학교 정문까지 왔다. 폭 3m가량의 좁은 인도에서 자전거가 요리조리 보행자 틈을 뚫고 다니는 사례도 많았는데, 학생들은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자전거 기척에 익숙한 듯 길가로 몸을 피했다. 이 학교에 다니는 6학년 여학생은 “등교 길에 자전거를 피하는 일이 일주일에 두세번은 된다”고 말했다. 이 학교 보안관은 “(학교 앞 인도로) 자전거는 원래 많이 다녔는데, 요새는 전동 킥보드도 꽤 늘었다”며 “학교 앞에 자전거 도로가 없어, 인도 주행이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은데 내가 단속할 권한은 없다”고 했다. 이 초등학교 근처에는 ‘어린이 보호구역’ 표지판과 함께 불법 주·정차, 자동차 저속 주행, 금연 등을 알리는 표지판은 많았지만, 인도 주행 금지를 상기시키는 경고문구는 찾아볼 수 없었다.
갈수록 증가하는 인도 주행, 왜?
아찔한 인도 주행이 늘어난 이유는 다양하다. 전동 킥보드의 경우 이용자들이 차도보다 인도 주행을 안전하게 느끼고 있다. 대학생 노지운(23)씨는 “기껏해야 시속 20~30㎞인 전동 킥보드로 차도를 달리면 자동차 운전자로부터 욕을 먹기 쉽고, 전동 킥보드 탑승자도 안전에 큰 위협을 느낀다”며 “법과 실생활이 괴리를 보이는 사례라서, 킥보드 이용자만 비난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이처럼 차도와 인도 사이를 방황하는 애매한 전동 킥보드의 지위를 명확히 하기 위해 정부와 국회가 도로교통법을 개정했고, 바뀐 법이 내달 10일부터 시행된다. 현재 ‘원동기 장치 자전거’(배기량 125㏄ 이하 오토바이)’로 분류되는 전동 킥보드를 전기자전거(최고속도 시속 25㎞ㆍ총중량 30㎏ 미만)의 일종으로 간주한 것이다. 이로써 내달부터 △전동 킥보드의 이용 연령이 16세에서 13세(중학교 1학년)로 낮아지고 △운전 면허 없이도 탈 수 있고 △자전거도로 통행이 공식 허용된다.
그러나 어린 학생들의 전동 킥보드 이용이 가능해진데다, 전체 자전거도로의 80%가 자전거ㆍ보행자 겸용도로라 앞으로 보행자와 탑승자 안전에 대한 우려는 더욱 커졌다. 일선 학교에선 벌써부터 “학생들이 전동 킥보드를 타고 등하교를 할까 봐 걱정”이라는 반응이 나온다. 서울 관악구의 한 중학교 교사 홍모(29)씨는 “최근 2학년 여학생이 친구 할머니 면허증으로 전동 킥보드를 타다가 넘어져서 손가락 뼈가 부러졌다”며 “지금도 ‘힙’ 해 보인다며 놀이기구처럼 아무렇지 않게 타는데 합법화가 되면 사고가 급증할 것 같다”고 말했다.
전제호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인도에서 시속 25㎞는 결코 느린 속도가 아니다. 더구나 전동 킥보드는 전기 자전거와 달리 운전 미숙자도 상당히 많다"며 제한 속도를 지금보다 낮출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전동 킥보드는 소음이 거의 없어 뒤에서 접근할 때 보행자가 알아채기 어려운 것도 위험 요인이다. 김규현 홍익대 기계시스템디자인공학과 교수는 “엔진 소음이 없는 전기차에 보행자 안전을 위해 인위적으로 소음을 나게 하는 장치(AVAS)를 장착하게 하는 방안을 전동 킥보드에도 적용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보행자 우선 원칙에 따라 전동 킥보드나 자전거가 다니는 길은 차도로 못 박는 게 근본적 해결책이란 지적도 나온다. 교통사고 전문가인 한문철 변호사는 “자전거ㆍ보행자 겸용도로에 전동 킥보드와 자전거가 다닐 수 있게 하면 보행자 안전이 크게 위협 받을 수밖에 없다”며 “차도의 일부를 자전거 전용 도로로 만들어 주고 인도에는 아예 못 다니게 해야 한다”고 했다.
오토바이의 인도 주행은 배달 애플리케이션(앱) 성행과 코로나19에 따른 배달 수요 급증도 원인으로 꼽힌다. 건당 배달료를 받는 구조 탓에 배달 시간을 줄일수록 유리한 배달 라이더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인도 주행을 한다는 것이다. 문제가 커지자 국토교통부와 경찰청은 지난 7월부터 이륜차 안전관리 강화대책을 내놨다. ‘교통안전 공익제보단’ 규모를 1,000명에서 2,000명 규모로 늘리고, 사고 다발지역 접근시 배달앱에서 알람이 울리도록 했다. 하지만 이는 시민 신고에 의존하는 것이고 인도 주행이 적발되더라도 범칙금 4만원, 운전면허 벌점 10점으로 처벌이 가벼워 인도 주행을 막기엔 역부족이다. 전제호 책임연구원은 “단속만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처벌을 강화해 한 번 걸리면 피해가 상당하다는 인식이 자리잡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라이더들은 시간에 쫓길 수밖에 없는 조건을 해소하는 게 우선이라고 말한다. 배달 라이더의 노조인 라이더유니온은 최근 기자회견에서 “화물차의 과로, 과속 등을 방지하기 위해 올해부터 도입된 화물차 안전운임제와 같은 제도를 배달 오토바이에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건당 3,000원으로 묶여 있는 배달료를 인상해 적정 운임을 보장해야 안전 운전도 가능할 것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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