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동아문화연구소 '사도세자의 죽음' 두고 공방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로부터 반역죄를 받아 죽었다. 하지만 후대 사람들은 사인(死因)을 놓고 미궁에 빠져 있다. 왜일까. 아들 정조가 아버지의 비행을 은폐하려 기록을 왜곡했기 때문이다.”(정병설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정조는 부친의 과오를 은폐하거나 광병을 부인하지 않았다. 반역 음모를 쓰지 않은 건 사실이 아니어서다. 정조가 ‘금등’(金?ㆍ왕실 비밀 문서)을 조작했다는 주장은 논리 비약이다. 증거가 부족하다.”(최성환 서울대 역사교육과 교수)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가 죽임 당한 이유는 논란거리다. 노론의 모함으로 죽었다는 ‘당쟁 희생설’이 있었다. 이인화의 소설 ‘영원한 제국’에 나온 ‘금등’이 그 상징이다. 영조가 뒤늦게 당쟁에 속아 아들을 죽인 걸 후회하며 이를 글로 지어 몰래 숨겨둔 상자가 금등인데, 정조가 즉위 뒤 이 문서를 찾아내 아버지 사도세자를 복권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2012년 정 교수는 ‘권력과 인간’을 통해 당쟁이 아니라 그저 반역죄로 죽었을 뿐이라는 ‘반역죄인설’을 내놨다.
그로부터 8년 만이다. 코로나19 상황을 감안, 지난 16일 서울대 동아문화연구소가 마련한 화상 회의에서 이 쟁점이 학계에서 처음 토론 대상이 됐다. 정 교수가 주제 발표를, 역사학자 5명과 국문학자 1명이 토론을 맡았다.
정 교수는 금등의 조작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는 정조가 사도세자 사후 31년 뒤인 1793년에 가서야 영조가 썼다며 금등의 존재를 공개한 정황 자체를 의심했다. 일단 일관성이 떨어진다. 영조는 아들 사도에게 계속해서 화를 냈다. 그러다 갑자기 후회한다 할 리 없다. 공개 시점도 특이하다. 그토록 중요한 문서라면, 즉위 뒤 아버지 사도의 복권을 위해 그토록 노력했던 정조가 왜 진작에 공개하지 않았느냐다. 더구나 정조가 원본 전체를 신하들에게 보여준 적이 없다. 금등이 진짜인지, 아닌지 검증할 수 없다.
김문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정황상 충분히 가능성 있는 추측”이라면서도 반대 의견을 고수했다. 김 교수는 조선의 왕들이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불리한 기록을 가리거나 지우거나 하는 경우는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선왕의 문서를 조작하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때문에 더 구체적 증거가 없는 한 섣불리 “정조가 조작했다”고 할 수 없다고 했다.
다른 의견도 나왔다. 박범 공주대 사학과 교수는 사도세자의 죽음은 아주 민감한 정치적 사건이었던 만큼 “영조가 정말 후회했는지, 정조가 금등을 왜곡했는지 같은 부분적인 사실보다 사건 전후의 구조적 사실 관계나 국면의 변화를 천착하는 게 더 생산적”이라고 했다.
역사학계 일부에 정조 우상화 기류가 있다는 정 교수의 비판에 일부 토론자들은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최성환 교수는 “역사학자들이 영ㆍ정조의 언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ㆍ미화하려 한다는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문식 교수는 “연구자들을 ‘임금 변호인’으로 매도하는 건 연구자들을 위축시켜 객관적 정조 평가를 방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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