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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책무'에 대하여

입력
2020.11.20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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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0 베네데토 크로체

전간기 유럽 지식 사회의' 등불'이었던 베네데토 크로체의 삶은 지식으로 이룬 권력의 성찰을 위한 거울이다. 위키피디아

전간기 유럽 지식 사회의' 등불'이었던 베네데토 크로체의 삶은 지식으로 이룬 권력의 성찰을 위한 거울이다. 위키피디아


이탈리아의 철학자 베네데토 크로체(Benedetto Croce, 1866.2.25~ 1952.11.20)는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라는 명제가 대변하는 '상대주의 역사관'의 아버지이자, 직관의 재발견을 통해 예술의 철학적 자립을 주선한 미학자였고, 헤겔에 관한 한 당대 최고의 철학자 중 한 명이었고, 파시즘 시대 비판적 자유와 저항의 상징으로서 20세기를 들여다보는 인문학도라면 결코 우회할 수 없는 거인이다. 또 파시즘 시대 이전 상원의원과 교육부장관을 지냈고, 전후 문화부장관과 상·하원 의원으로서 정치에도 가담했다.

그가 역사철학자로만 친숙한 것은 물론 '근대 사학의 태두'라 불리는 독일 역사학자 랑케의 객관 역사주의 역사관 즉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엎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료의 부정확성과 불충분함, 사가의 적극적 선택의 개입을, 역사의 한계가 아니라 본질로 수용했다. 그는 당대 이탈리아의 역사를, 무솔리니의 파시즘이 기록될 역사를 경계해야 했다.

무솔리니의 파시즘은 1919년 등장해 무서운 기세로 전후 대중을 장악하며 1922년 10월 검은셔츠단의 로마 진군을 성사시킴으로써 집권했다. 당대 유럽 청년 지식사회의 상징적 존재였던 크로체는 굴종도 망명도 거부하며 나폴리에 남아 파시즘과 싸웠다. 그는 1903년 자신이 창간한 월간지 '비평(La Critica)'을, 제자와 동료 지식인들이 사라진 뒤에도 변함없는 논조로, 나중에는 거의 혼자 발행했다. 그와 잡지 '비평'은 파시즘 시대 이탈리아의 유일한 자유의 빛이었고, 무솔리니조차 감히 그 빛을 덮거나 가리지 못했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당시의 크로체는) 4,000만의 자국민들 속에서 일종의 유리병 속에 있는 것과 같았다"고 했다. 츠바이크에게 크로체는 인간의 영혼을 발랄하고 탄력 있게 유지해주는 것은 '저항'이라고, "정신적 인간에게 저항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만큼 해로운 것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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