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종 위기종의 '정의'를 대변한 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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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종 위기종의 '정의'를 대변한 과학자

입력
2020.11.16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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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나 메이스(Georgina Mace, 1953.7.12~ 2020.9.19)

조지나 메이스는 세계자연보전협회(IUCN) 멸종 위기종 보고서 '레드리스트'의 과학적 선정 기준을 정립한 영국의 동물학자다, 그는 지구 생물종 다양성의 가치를 누구보다 중시한 학자이면서 파괴의 실태를 고발하는 일 못지않게 상생의 해법을 중시한 현실주의자였고, 다양한 분야의 연구집단 및 운동단체의 이견과 정책집단, 심지어 경제-산업계 등의 극단적 대립을 중재하며 생태주의의 새로운 미래를 모색한 개척자였다. Jussi Puikkonen/KNAW


세계자연기금(WWF)과 런던동물학회(ZSL)의 생물종 다양성 지표 'Living Planet Index' 2020년 보고서는 지구 야생 척추동물 개체 수가 1970~2016년 사이 68% 감소했다고 밝혔다. 같은 기간 인구는 37억 명에서 74억 명으로 2배 늘었다. 유엔 '생물 다양성 및 생태 보존 과학 정책 플랫폼(IPBES)'은 2019년 5월 보고서에서 생물 약 100만 종이 인간으로 인해 멸종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밝혔다. 1만년 전 지구의 육상 척추동물 중 비중 1%에 불과하던 호모사피엔스는 2011년 32%로 늘어났고, 야생동물은 99%에서 1%로 격감했다. 나머지 67%는 인간을 위한 가축이었다. '지구 6번째 대멸종(Sixth Mass Extinction)' 진단을 뒷받침하는 데이터는 저 말고도 부지기수다.

2차대전의 수많은 살육과 민족 멸절의 야수적 기획을 경험한 국제사회는 유엔 창설 3년 뒤인 1948년 유엔 회원국과 비정부기구 연합 세계 최대 환경단체인 '세계자연보전협회(IUCN)'를 설립했고, 64년부터 IUCN '레드리스트(Red List)' 즉 멸종 위기종 보고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IUCN은 숫자 말고도 사라져가는 종의 명단을 함께 발표한다. 근년 보고서에는 '유럽 햄스터'와 '북대서양 참고래' '황금대나무여우원숭이' 등 3만2,000여 종이 담겼다.

인류는 은하만큼이나 지구 생태계를 모른다

IPBES가 밝힌 멸종 위기종 100만 종과 IUCN의 3만2,000종의 차이는, 인류가 우리 은하의 생태계보다 지구 생태계를 더 모른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1980년 일군의 곤충학자가 중미 파나마 우림의 나무 19그루를 털어 곤충을 채집했다가 딱정벌레의 약 80%(1,200여 종)가 미기록종(신종)인 사실에 경악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2020년 현재 인류가 아는 지구 생명체는 140만~180만 종이지만, 실제 종 수가 얼마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최소 1억 종은 되리란 추정도 있다. 그 경우 한해 멸종률을 1%만 잡아도 매년 100만 종이 인간도 모르게 인간에 의해 사라지는 셈이 된다. 과학자들은 인간으로 인한 생물종 멸종률이 저절로 멸종하는 자연멸종률(background extinction rate)의 1,000~1만 배에 이른다고 추정한다.

IUCN 레드리스트는, 예산과 종에 대한 지식의 한계 때문에, 이미 확인된 생물종 가운데 일부만 단위지역 내 개체 수 변화와 서식지 파괴 등을 실증적으로 분석해 발표하는, 가장 '보수적'인 보고서다. 그들의 멸종 위기종 3만2,000종은 2019년 기준 기록종의 10%도 안 되는 12만 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였고, 올해 목표는 16만 종을 조사한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환경-생태보전 학계와 활동가 중에는 IUCN보고서가 위기 실태를 온전히 반영하지 못한다고, 조사 및 평가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IUCN 레드리스트가 가장 오래되고 권위있는 지구 생태계 지표라는 데에는 별 이견이 없다. 생물종 다양성에 대한 과학적 연구와 추정, 실질적 보존 활동이 레드리스트 덕에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90년대 30대 무명의 여성 생물학자 조지나 메이스(Georgina Mace) 덕이었다. 메이스는 주먹구구식이던 당시 IUCN 레드리스트에 과학적 선정 기준과 조사 방법론을 도입했고, IUCN을 좌지우지하던 학계 원로와 국제적 권위자들을 논박하고 설득해 지금의 새 방식을 채택하게 했다. 그 담대한 추진력과 끈질긴 설득력으로 IUCN 레드리스트의 권위를 구축하고, 90년대 이후 유엔 및 국가별 생태보전정책과 학계 비정부기구의 이견들을 조율해온 그가 9월 19일 암과의 긴 투병끝에 별세했다. 향년 67세.


메이스 덕에 가능했던 IUCN 레드리스트의 근년 그래픽. 숫자로 나열된 저 대멸종의 추이 속에서도 메이스는 희망을 잃지 않았고, 인류의 가능성을 믿었다. iucnredlist.org


'메이스 이전(Pre-Mace)', 그러니까 90년대 중반까지 레드리스트는 소수의 원로급 생물-생태학자들이 과학적 근거나 기준 없이, 조금 과장하면 인기투표하듯 목록을 뽑곤 했다고 한다. "침팬지나 표범처럼 카리스마 있는" 동물들이 실상과 무관하게 포함되기 일쑤였고, 정작 보호가 절실한 지의류 등 생소한 식물이나 볼품 없고 덜 알려진 작은 동물들은 철저히 외면 당했다. 인류는 극히 최근에야 자연 생태계가 섬세하게 상호작용하며 절묘한 균형을 유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런던 근교 루이셤(Lewisham)에서 의사 아버지와 의료 일러스트레이터 어머니의 세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메이스는 리버풀대(동물학, 76년)를 거쳐 서섹스대에서 소형 포유동물과 영장류 뇌 크기 및 진화의 상관관계를 주제로 한 논문으로 79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워싱턴 스미소니언연구소 등지에서 박사후과정을 마치고 80년대 초 뉴캐슬대 연구원으로 생물종 멸종 요인 연구를 시작하면서 그의 관심은 점차 실험실에서 현장으로 옮겨갔다. 80년대 말 영국동물원협회(현 BIAZA)를 도와 종별 출산율과 사망률 추이 등을 추적하는 컴퓨터 모델링 프로그램을 개발하기도 했다. 레드리스트의 중추적 학자 중 한 명이던 미국 보존생물학자 율리시즈 실(Ulysses Seal, 1929~2003)이 1987년, 34세의 메이스를 IUCN 레드리스트 위원회에 추천했다. 유엔과 회원국 환경 및 보전 정책의 기준으로 삼기에 당시 레드리스트가 너무 허술하다는 비판이 거세지던 때였다. 스미소니언연구소 시절부터 메이스의 연구와 데이터 분석 능력을 눈여겨본 실은 메이스에게 새로운 기준을 마련해보라고 제안했다. 달리 대안이 없던 IUCN의 '터줏대감'들은 그 뜨악한 제안에 '그럼 해보든가' 식 태도로 일관했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었다. 메이스는 런던동물학회 수의과 사무실 한 켠에서, IUCN의 급여나 활동비 지원도 없이, 세계 과학자들과 편지와 팩스로 소통하며 지금의 '레드리스트' 원칙과 기준을 만들었고, 그 결과를 91년 미국 생물학자 러셀 랜드(Russell Lande)와 함께 '멸종 위기 평가- IUCN 위기종 범주 재평가를 위하여'란 제목의 논문으로 발표했다.

종 다양성은 사회 정의의 문제다

메이스의 기준으로 조사·평가한 첫 레드리스트 보고서가 96년 발표되자 난리가 났다. 판다나 북극곰, 흰코뿔소 등 특정 인기 동식물을 앞세워 보호 활동과 모금, 국제기구의 지원금을 받던 단체와 국가가 먼저 경악했고, "아프리카코끼리 못지않게 대구와 대서양참다랑어(bluefin tuna)도 멸종 위기라는 평가에 원양업계와 어업국들이 삿대질을 퍼부었다. 2009년 인터뷰에서 메이스는 "내 기준이 채택되기까지 엄청난 반발과 반박이 있었고, IUCN위원회의 공식 승인을 받기까지 10년 넘게 걸렸다"고 말했다. 학계 원로들의 어깃장에 맞서고 그들의 체면까지 다독이며 설득하는 것도 고된 일이었다. 1991년 박사후과정 연구원으로 IUCN 레드리스트 작업에 동참하면서 메이스를 알게 된 현 IUCN 위원 E.J 밀너 걸랜드(E.J. Milner Gulland)는 "당시 토론장을 가득 채운 남자들 틈에 여성은 메이스 혼자일 때도 많았다"고 그의 부고에 썼다. "(하지만 그는) 한결같이 부드러운 어조를 견지하면서도, 허튼소리는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훗날 메이스는 종 다양성 원칙을 '사회 정의'의 문제라고 말했다. 생태계 건강성이 인류 복지와 밀접하게 연결된 문제라는 실용주의적 의미의 말이었지만, 역량과 예산의 한계로 종 보존의 우선순위를 매길 땐 매기더라도, 멸종 위기에 대한 판단만큼은 과학적 기준에 따라 차별 없이 이뤄져야 한다는 원칙적 정의도 염두에 둔 말이었을 것이다.

생물학자들끼리도 전공분야에 따라 극명한 이견을 보일 때가 잦다. 전공 종의 레드리스트 포함 여부에 따라 연구비 지원 규모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환경운동 진영 안에서도, 가령 기후 진영과 생태보전 진영은 흔히 서로를 견제한다. 조류 보호를 위해 풍력 등 재생가능에너지 설비 확대에 반대하고, 모피는 물론이고 거위털(down)이나 양모(wool) 소비까지 반대하면서 석유 부산물인 합성섬유를 고집하는 이들도 있다. 정책 영역으로 넘어가 경제-산업계와 벌이는 논쟁은 전시 휴전협상을 방불케 할 만큼 살벌하다고 한다.

메이스는 여성 최초 영국생태학회장과 국제보존생물학회장, 런던동물학회 과학분과위원장과 회장(2000~06)을 역임했고, 유엔이 과학자 1,300여 명을 동원해 인류복지와 생태계의 연관성을 연구한 '밀레니엄 에코시스템 어세스먼트(2002~2005)를 이끌었다. 런던 임페리얼칼리지 자연환경연구위원회 집단생물학센터장(2006~12), 런던대 종다양성 및 환경 연구소(CBER) 소장(2012~)을 지냈고, 2018년 영국 정부의 기후변화 위원회 자문위원으로도 활약했다. 2002년 영국 왕립학회 회원이 됐고, 왕실이 수여하는 훈장 세 개(98년 OBE, 2007년 CBE, 2016년 DBE)를 받았다. 그는 숨지기 2주 전까지 일했다고 한다.

부고보다 풍성한 찡한 댓글들

EJ가 쓴 부고의 댓글로 동물학자 조지 챈(George Chan)은 메이스가 학창시절 한 친구와 벌였다는 '치마 올려 입기' 내기 이야기를 소개했다. 친구가 '선'을 넘어 선생님의 주의를 받게 되면서 그가 이겼다는 그 일화로 챈은 메이스의 유쾌한 유머감각을 환기했지만, '선'을 넘지 않는 그의 탁월한 감각도 함께 말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메이스의 그 감각은 90년대 IUCN 원로들과의 토론서부터, 저 다양한 기관을 이끌면서, 또 여러 정책 당국자들과의 협상에서도 빛을 발했다. IUCN의 한 학자(Jane Smart)는 "격렬한 논쟁 와중에도 메이스가 발언을 시작하며 문제의 핵심을 찌르면 소동이 잠잠해지곤 했다"고, "그는 권위와 자상함과 지혜와 멋진 유머를 지닌 사람"이었다고 역시 댓글로 애도했다.

88년 메이스가 동물원협회 수의과 건물 한 켠에서 일할 때 그를 알게 됐다는 한 수의학자(Andrew Cunningham)는 "당시 햇병아리였던 나를 늘 뒤에서 격려하고 조언하며, 내 커리어를 일구는 데 결정적 도움을 주었다"고 썼고, 한 경제학자(Ece Ozdemiroglu)는 "제한된 자원 조건 속에서 한 종이 어떻게 생존하며 더 나은 여건을 만들어갈 수 있을지 추구한다는 점에서 경제학도 생물학과 다르지 않다는 걸 일깨워준 게 그였다"고, "나는 조지나 덕분에 조금은 나은 경제학자가 될 수 있었다"고 썼다. 메이스의 남동생(Edward Mace)은 "내 누이가 이렇게 많은 이들로부터 이런 멋진 평판을 듣고 산 사실을 가족인 우리조차 알지 못했다"고 썼다.

메이스가 동료들, 특히 젊은 여성 연구자들에게 헌신적이었다는 사실도 줄지어 달린 댓글들로 새삼 도드라졌다. 2013년 그를 처음 만난 한 젊은 연구자(Moreno Di Marco)는 "그는 처음부터 친절과 호의가 아니라 대등한 동료로서 나를 존중했다. 메이스쯤 되는 위상의 과학자에게 결코 기대하기 힘든 태도였다"고 썼고, 학부 시절 진로 상담 이메일을 썼다가 그의 친절한 답장에 감동했다는 일화를 소개한 이(Helen Meredith)도 있었다. 박사학위 논문 심사자로 그를 만난 한 연구자(Ana Rodrigues)는 "한 시간여의 1대1 논문 심사 토론을 마친 뒤 나는 마치 그와 절친한 학자적 관계를 맺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며 "그 느낌에 용기를 내 얼마 뒤 그에게 박사후과정 지원 추천서를 부탁해서 받았는데, 나는 뒤늦게야 당시 그가 투병중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도 썼다. 그의 동료로 IUCN에서 35년을 함께 지낸, 현 영국 보전연구단체 '공존 지구(Synchronicity Earth)'의 전략보전팀장 사이먼 스튜어트(Simon Stuart)는 언젠가 메이스의 도움이 절실해서 가뜩이나 바쁜 그에게 '갖은 아첨을 떨며' 부탁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여러 사람이 함께 있던 그 자리에서 메이스가 스튜어트를 보며 '이런 징글맞은 녀석(You slimy toad!)'이라며 빙긋이 웃었다고, "그게 내 생애 최고의 영광 중 하나였다"고 썼다.

젊은 여성 과학인 단체인 솝박스 사이언스의 거리 행사에 나선 2011년 런던 거리의 조지나 메이스. 그는 동료와 젊은 학자들, 특히 여성 과학자들을 돕는 일에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soapboxscience.org


'솝박스 사이언스(SoapBox Science)'는 영국의 젊은 여성 과학자들이 여성 과학인 지위 향상을 위해 2011년 만든 단체다. 그들이 런던 등 영국 대도시 거리에 직접 나가 각자 자기 연구분야를 시민들에게 알리는 행사를 기획하며, 맨 먼저 조지나 메이스를 떠올린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세계적 팝스타에게 무료 거리 공연을 청하는 일만큼이나 대담한 일이기도 했다. 단체 창립행사 때도 축하 연설을 해줬던 메이스는 흔쾌히 동참을 약속했고 동료 여성학자들의 참여도 주선했다. 그는 '자연의 가치는 무엇일까요?'라는 문구와 함께 자기 이름을 적은 피켓을 들고 행사 당일 런던 사우스뱅크 거리에서 1,000여 명의 시민을 만났다. 런던동물학회 회원인 솝박스의 코디네이터 이슬라 와튼(Isla Watton)은 "메이스가 친구들에게 '솝박스 사이언스 거리 행사는 내 생애 최고로 짜릿한 경험이었다'고 고백한 사실을 나는 한참 뒤에야 전해 들었다"고 부고에 썼다. 조지나 메이스는 경영 컨설턴트 로드 에반스(Rod Evans)와 85년 결혼해 자녀 셋을 두었다.

인류의 생물종 다양성 보존 노력은 성과보다 실패의 기록이 훨씬 두텁다. WWF 설립자 피터 스코트(Peter Scott)는 1970년에 이미 "우리는 실패했고, 단 한 종도 구해내지 못했다. 우리가 쓴 돈으로 콘돔을 사서 배포했다면, 더 나았을지 모르겠다"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조지나 메이스는 2009년 인터뷰에서 "모든 데이터가 말해주듯 인류가 한 마음으로 문제를 풀어간다면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말했다. 숨지기 9일 전인 9월 10일 '네이처'에 발표한 그의 논문 요지도 인류에겐 아직 종 다양성 '그래프를 반전시킬 수 있는(bend the curve)' 기회가 남아 있다는 거였다. 영국의 저명 환경운동가 겸 탐사 저널리스트 조지 몽비오(George Monbiot)는 근작 '활생'(김산하 옮김, 위고)에서 무엇에 맞서 싸우는지 아는 것만큼이나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도 알아야 한다며 "1온스의 희망은 1톤의 절망보다 강력하다"고 썼다. 한껏 치마를 추켜 올리면서도, 다시 말해 원하는 바를 한껏 추구하면서도, 끝내 현실주의자였던 메이스는 1톤의 희망을 남겼다. 그는 동료들을, 인류를 믿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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