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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한국일보>
여성만 장관을 맡은 부처는 여성가족부가 유일하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1년 여성부(현 여성가족부)를 신설하며 초대 한명숙 장관에게 “여성이 적극 참여해 여성의 힘으로 양성평등 사회를 주체적으로 열어나가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여성이라서 겪는 불합리함을 가장 잘 알기에 주도적으로 현실을 변화시키라는 의미일 테다. 500조원 안팎의 한 해 정부 예산 중 여가부 몫은 0.2%에 불과하지만, 존재 자체로 상징성이 큰 이유다.
□ 인원도, 살림도 적은 ‘미니부처’라서 도리어 장관의 역할이 중요하다. 법무부, 보건복지부, 고용노동부 같은 다른 부처와 조율해야 할 업무도 많다. 여가부 장관의 의견이나 태도가 여성 관련 정책이나 입법의 기준처럼 여겨지는 게 그래서다. 2003~2005년 재임한 지은희 전 장관이 대표적이다. ‘성매매특별법’ 제정 논란 때는 “성매매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정부의 의지를 드러냈고, 호주제 폐지와 관련해선 “개인별 신분등록부인 1인1적제가 원칙”이라며 여론을 이끌었다.
□ 여성에게는 방패가, 성평등을 저지하는 세력엔 창이 돼야 할 장관의 역할이 뒤바뀌었다. 이정옥 여가부 장관 얘기다. 여성들은 시위로, ‘미투’로 성폭력 없는 세상을 만들어 보자고 분노로 행동하는데 정작 여가부 장관은 성범죄를 성범죄라 부르지 못한다. 여당 소속 광역단체장들의 성폭력 사건으로 치러지는 보궐선거를 두고는 “전 국민이 성인지 학습을 할 기회”라고 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국가를 위해 긍정적인 요소를 찾아야 한다”는 궤변과 함께다.
□ 여가부 장관의 머릿속에 있어야 할 잣대는 국가도, 정권도, 여당도 아니다. 여성이다. 자신을 향한 비판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앞의 단어들을 뇌리에서 지워보면 된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스스로 물러나는 게 맞다. 여성들에게는 ‘대체 장관이 하는 일이 무엇이냐’는 배신감과 회의가 들게 하고, 반대 정파에는 정쟁의 빌미를 쥐여주며, 성폭력 피해 여성들에게는 좌절감을 안기고 있다. 그러니 여가부를 없애는 게 낫다고? 장관이 문제라서 부처를 폐지하기 시작하면, 남아날 곳이 없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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