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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사그라든 자리...누추한 환멸만 남았다

입력
2020.11.12 04:3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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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김혜진 '불과 나의 자서전'

편집자주

※ 한국일보문학상이 53번째 주인공 찾기에 나섭니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작품은 10편. 심사위원들이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본심에 오른 작품을 2편씩 소개합니다(작가 이름 가나다순). 수상작은 본심을 거쳐 이달 하순 발표합니다.



김혜진 작가. 현대문학 제공 ⓒ이해수

김혜진 작가. 현대문학 제공 ⓒ이해수


재개발을 둘러싼 지역민의 갈등과 분화는 김혜진의 단편 소설 ‘3구역, 1구역’에서도 정교하게 그려진 바 있다. ‘불과 나의 자서전’이라는 중편소설은 이를 본격화하면서 삶의 터전이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만약 그것이 달라진다면 어떤 방식으로 달라지는지에 대한 폭로를 병치한 작품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주해’는 인상적인 인물로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 틀림없다. 주해는 ‘잘못된 건 잘못됐다고 말해야죠’라고 당당히 말하며 부당한 것, 불편한 것을 고치기 위해 지적하고 호소하고 청원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다.

당장 개발이 되어도 어색하지 않을 남일동 꼭대기 동네로 이사온 그녀는 어두운 집 앞 골목에 가로등을 세우는 일을 제일 먼저 한다. 직접 전기를 설치한 것은 아니고 일곱 번이나 구청을 찾아가고 민원실에 전화를 걸어 그 일이 기어이 실행되도록 만든다. 주민들 모두 어두운 채로 지내는 일에 익숙해져 불편을 참고, 환경을 나아지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않을 때, 주해는 주저하지 않고 그 일을 직접 해내서 어두운 거리에 불을 밝힌다.

그녀는 남일동 비탈길에 들어오지 않던 마을버스 노선도 확장한다. 버스 정류장 신설 문제는 주민 청원이 필수인 탓에 괄시를 받으면서도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마을버스의 필요성을 호소하기에 이르지만 주민들은 냉랭하다.

애원하고 사정하다시피 하며 힘들게 청원서를 받아내 기어이 마을버스를 유치한 주해를 향해 ‘나’는 뭘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묻는다. 주해는 아쉬운 사람이 뭐든 하는 법이고, 내가 원해서 하는 거라고 쉽게 대답하지만 혜택은 남일동 사람 모두가 받는다. 이렇듯 그녀는 자신도 좋고 남들에게도 좋은 일은 반드시 해내 주위를 서서히 변화시키는 인물이다.



하지만 주해가 대로변에서 모르는 사람들에게 쥐어뜯기는 사건이 발생한 후로 주민들은 그녀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그동안 주해가 무엇을 함구해왔는지, 과거에 어떤 일을 저지르고 남일동으로 들어왔는지, 그 일에 대해 그간 어떻게 침묵해 왔는지에 대해서. 그녀는 잘못된 건 잘못됐다고 말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지만 자신과 관계된 부당한 일에 대해서는 시키는 대로 했다고 비겁하게 변명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이 인물에 대해 누구도 쉽게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나’의 가족이 처음으로 어렵게 경매로 마련한 집이 사실은 경제적으로 갑자기 위태로워진 평범하고 단란한 이웃을 내쫓고 획득한 집이라는 사실과도 호응한다.

변화와 희망은 인물의 몰락으로 사그라들고 도덕적 환멸만 누추히 남는다. 개발의 기대 역시 무너지면서 남일동 일대는 다시 어둠에 묻힌다. 소설 말미 남일동이 불타 없어지기를 바라며 방화를 저지르는 ‘나’의 행위는 대단한 피해로 이어지지 못하고 단순 실화로 처리되고 만다. 복잡한 개발의 경제를 잠재울 불길은 어디에도 없다.

편혜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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