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씨, 돈가스!"
"아, 네, 감독님. 돈가스!"
영화 '애비규환' 촬영 현장에서 가장 많이 들린 단어는 '돈가스'였다. "돈가스~!"하면 "아, 돈가스~!"의 연속이었다. 이 영화가 장편 데뷔작인 감독 최하나(28), 마찬가지로 이 영화로 첫 장편 주연을 맡은 정수정(26)간 소통의 '만능 치트키'가 돈가스였던 셈.
사연은 이랬다. 걸그룹 f(x)의 크리스탈로 활동해온 정수정이 이 작품에서 맡은 역할은 임신 5개월 차 대학생 '토일'. 스물 두 살짜리 토일은 부모 앞에 '임신 5개년 계획'을 설파하고, 황당해하는 부모에게 "아이를 미리 낳으면 나중에 편하지 않을까"라고 "발상의 전환"을 역설하기도 한다.
최 감독의 주문은, 그럴 때마다 "나 임신했어"라는 말조차 "나 어제 돈까스 먹었어" 하듯 하라는 요구였다. 토일이라면, 임신도 어제 저녁 메뉴로 먹은 돈가스처럼 대수로워하지 않으리란 얘기였다. "제가 감을 못잡거나 감독님이 생각한 톤이 안 나오면 항상 '수정씨, 돈가스'를 외쳤죠."(정수정) "심각한 내용인데도 너무 천진하게 말해서 사람 속을 뒤집어놓는 캐릭터를 떠올렸어요. 돈가스라 말하면 모든 톤을 잘 잡더라고요."(최하나)
90년대생 20대 여성 감독과 배우의 만남만으로도 화제가 된 '애비규환'팀다운 얘기다. 둘은 처음부터 죽이 잘 맞았다. 처음엔 토일 캐릭터를 만들어내기 위해 일주일에 네댓 번씩 따로 만났다. 또래인데다 음악·영화 취향까지 비슷했다. "즉각적으로 통하고 공유할 수 있는 것들이 확실했어요. 결이 맞는 사람, 수정씨가 그런 사람이었죠. 서로 많이 의지했어요."(최하나) "영화 때문에 만났는데, 너무 좋은 친구가 생긴거죠. 서로 토닥거려 주면서 촬영했어요."(정수정)
그래선지 '애비규환'에는 20대 여성의 재기발랄함이 넘쳐난다. 아비규환(阿鼻叫喚)을 살짝 비튼 제목이지만, 영화 내용으로 보면 "애비들의 아비규환"(정수정)이다. 토일은 자신의 임신을 반겨주지 않는 엄마(장혜진)와 새아빠(최덕문)에 실망한 나머지 10여년 간 연락이 끊긴 친아빠(이해영)를 찾아나선다. 그 사이 예비아빠인 남자친구 호훈(신재휘)마저 사라진다.
영화는 이걸 심각하다기보다 유쾌한 코미디로 그려내는데, 그래서 현대 한국 가족의 다양한 모습도 유머러스하게 처리해나간다. 가정을 버린 친아빠가 '기술·가정' 교사라고 설정되어 있거나, 결혼식에서 엄마가 수트를 입고 아빠는 한복을 입는 식이다. 이혼하고 재혼한 가정도 좀 특이하다 뿐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영화는 흔히들 정상적인 것, 보편적이라는 것들을 끊임없이, 유쾌하게 횡단한다.
"이혼·재혼 가정은 주변에 워낙 많아서 사실 지극히 평범한 가족인데도 아직까진 사회적 낙인이 남아있는 것 같아요. 오히려 자기 삶의 오류를 인정하고 고치기로 결심한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불행하지 않고 더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바라봐줬으면 했어요. 그런 사람들을 응원하고 싶었습니다."(최하나)
그런 영화니까, 토일이란 캐릭터가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들어 여성 캐릭터가 다양해졌다지만, 토일은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수준이다. 그러니 정수정 캐스팅 자체가 놀랍다. 배우로 전향했다 해도 왕년의 걸그룹 아이돌을, 당당한 임산부 역할로 불러들이다니.
최 감독은 정수정, 아니 크리스탈에게서 이미 토일을 봤다고 했다. "애교 많고 잘 웃는 전형적인 걸그룹 이미지가 아닌, 크리스탈을 평소에도 좋아했어요. 당찬 토일과 잘 어울릴 것 같았죠. 많이 설명하지 않아도 쉽게 토일을 구현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정수정도 같은 소리를 했다. "대본을 읽고나니 안 할 이유가 없었어요. 생각대로 움직이고 강단있고 자기 자신을 100% 믿는 게 저랑 비슷하면서도 극단적인 건 저랑 달랐죠.(웃음) 그런 캐릭터를 살아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최 감독이, 그래서 토일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여성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근래 들어 나오고 있는 여성 서사들은 대개 '멋지고, 닮고 싶은 여성' 같아요. 물론 그것도 그것대로 좋은데, 저는 '결함이 있는 여성'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 나이대의 만용이랄까, 넘치는 자신감과 용감함으로 실수도 하고, 그것 때문에 절망하기도 하지만 다시금 극복해내는 인물. 그런 인간적인 사람을 그려내고 싶었어요."
영화 엔딩은 뜻밖의 장면이 차지한다. 정수정은 "촬영하면서도 쾌감이랄까, 새로웠고 멋있었다. 많은 엄마, 딸들이 좋아할 것 같다"고 했다. "관습을 훨씬 벗어난 새로운 가능성이라는 생각으로 꼭 보여주고 싶었던 장면"(최하나)이라고도 했다. '애비규환'은 그런 담백한 격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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