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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작이 꿈이었던 국민아버지 송재호...마지막 목표는 '노인과 바다' 같은 작품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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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작이 꿈이었던 국민아버지 송재호...마지막 목표는 '노인과 바다' 같은 작품 출연

입력
2020.11.07 23:16
수정
2020.11.07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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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송재호. 연합뉴스

배우 송재호. 연합뉴스


인자하고 정 많은 아버지로 오랜 기간 폭넓은 사랑을 받아온 국민배우 송재호가 7일 별세했다. 향년 83세.

1937년 북한 평양 출신으로 부산에서 자란 그의 청년 시절 꿈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었다. 고교 시절부터 손에서 카메라를 손에서 떼지 않았을 만큼 영화에 대한 애정이 컸던 그는 시나리오를 써야겠다는 생각에 부산 동아대 국어국문과에 입학했다. 1959년 KBS 부산방송총국 성우로 데뷔한 송재호는 틈틈이 뜻이 맞는 이들과 연극을 하기도 했다.

그의 사전엔 불가능이란 없었다. 보다 넓은 세상에서 연기하고 싶다는 마음에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아는 이 한 명 없는 충무로에서 우연히 먼저 연기자로 데뷔한 지인을 만나 그의 소개로 '하녀'로 유명한 김기영 감독을 만나 다짜고짜 영화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내 영화에는 쌍커풀 없음 출연 못한다"는 말과 함께 퇴짜를 맞았고 오기가 발동해 곧바로 성형외과를 찾아 쌍꺼풀 수술을 받기까지 했다.

김기영 감독의 영화에는 출연하진 못했지만 이후 박종호 감독과의 인연으로 1964년 '학사주점'에 출연하며 본격적인 배우의 길로 들어섰다. 1968년 86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KBS 드라마 오디션에 합격하며 특채 탤런트로 선발되기도 했다.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


이후 주연을 맡은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1975)의 흥행과 함께 스타덤에 올랐다. 그는 훗날 당시를 회고하며 "극장 앞에서 골목까지 줄을 선 사람들을 보니 눈물이 났다"며 "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에 사람이 그렇게 몰렸다는 사실에 감격스러웠다"고 말했다. 장미희와 함께 주연을 맡은 김호선 감독의 '세 번은 짧게 세 번은 길게'(1981)도 크게 성공했다. 선한 인상 때문에 중년이 된 이후에는 주로 인자하고 정 많은 아버지 역할로 많이 출연했지만 젊은 시절에는 반항아 등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했다.

1980년대 한국영화가 쇠락하면서 영화와 점점 멀어진 뒤엔 주무대를 TV로 옮겼다. '보통사람들'과 '열풍' '사랑이 꽃피는 나무' '내일은 사랑' '용의 눈물' '부모님 전상서' '장미와 콩나물' '상도' 등 가족드라마와 시대극, 청춘드라마를 오가며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1978년부터는 취미로 시작한 사격에 열정을 쏟았다. 박종규 전 청와대 경호실장과의 인연으로 총을 잡은 뒤 클레이사격 마니아가 됐다. 1979년 서울용호구락부 소속 사격연맹에 선수로 등록됐고 이후 전국체전에 출전해 금메달을 딸 만큼 실력이 취미 수준을 넘어서기도 했다. 국제사격연맹 심판 자격증도 갖춰 1986년 아시안게임 사격종목 국제심판, 1988년 서울 올림픽 사격종목 보조심판으로도 활약했다.

불교도인 어머니에게서 '미물이라도 함부로 죽이지 말라'는 교육을 받았던 그는 "오래도록 사격에 빠져 살았지만 한번도 동물 살상 목적으로 총을 들지 않았다"고 했다. 대한수렵연합회 부회장 겸 밀렵감시단장을 지냈던 이유다. "밀렵이야말로 생태환경을 위협하는 만행"이라고 했던 그는 한 인터뷰에서 밀렵을 단속하다 죽을 뻔한 위협을 겪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배우 송재호. 한국일보 자료사진

배우 송재호. 한국일보 자료사진


영화 제작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여러 편의 시나리오를 직접 썼던 그는 영화사를 차렸다가 큰 위기를 맞기도 했다. 한 여성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30대 시절 영화제작사를 차렸으나 망해 1억원이 넘는 빚을 지게 됐고 이후 사채를 쓰기 시작하면서 경제적으로 곤경에 처했다고 밝혔다. 사채빛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생각하기도 했다고도 했다. 이후 2000년 NM필름이라는 영화사를 설립하고 다시 미국 뉴욕에서 촬영하는 영화를 기획했으나 9·11테러로 인해 무산됐다. 같은 해 교통사고로 당시 스물여덟이던 막내아들을 잃고 그로 인한 충격으로 한동안 병원 신세를 졌다. 극심한 충격과 분노로 단기 기억상실증을 앓기까지 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는 영화보다 드라마 출연작이 많았다. 조연이나 단역배우들에게 인격적인 대우를 하지 않는 영화 현장에 대한 불만으로 영화계를 멀리했던 그는 2001년 개봉한 '무사' 출연을 계기로 다시 충무로로 돌아왔다. 이후 봉준호 감독의 출세작 '살인의 추억'을 비롯해 '그때 그사람들' '화려한 휴가' '해운대' 등에 출연했다. 2013년까지는 매년 1편 이상의 영화에 출연했는데 이후 2년에 한 편 꼴로 출연작이 줄었다. 2015년 '연평해전' 2017년 '길'에 이어 지난해 개봉한 '자전차왕 엄복동' '질투의 역사'로 충무로와 작별을 고했다.

배우 송재호. 한국일보 자료사진

배우 송재호. 한국일보 자료사진


연기자로서 말년의 목표는 앤서니 퀸 주연의 '노인과 바다' 같은 영화에 출연하는 것이었으나 지난해부터 건강이 악화되면서 꿈을 이루지 못했다.

고인은 치열하게 인생을 살다간 배우였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성우로 일하다 처음 충무로에 와서 배우들을 보는데 모두 눈에 익은 사람들이지만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 번 해보자, 안 될 것 없잖아'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도전했죠. 그때나 이후에나 저는 모든 일에 '안 될 것 없다'는 생각으로 임했습니다. 체념하고 포기하고 지내기엔 삶이 너무 짧고 고귀하잖아요."




고경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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