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 사흘이 지나도록 대선 승자가 나오지 않는 개표 지연에 미국이란 거대 공동체가 완전히 두 동강 났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양측 후보 지지자들은 상대를 향해 격한 말을 퍼붓고, 법을 위반한 분풀이를 하며 분열 사회로 치닫는 중이다. 패색이 짙어진 대통령은 폭력을 독려하는 듯한 발언으로 성난 민심을 더욱 자극했다. 2020년 미 대선의 결과가 어떻게 끝날지 몰라도 민주주의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거짓과 증오로 얼룩진 정치 후유증을 치유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개표 중단 vs 개표 촉구" 양분된 미국
5일(현지시간) 일간 뉴욕타임스(NYT) 등 미 언론에 따르면 개표 사흘째인 이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 지지자들은 나라 전역에서 격렬한 시위와 충돌을 이어 갔다. 트럼프 대통령 지지자들은 이날도 초접전 중인 경합주(州) 개표소로 몰려가 부정 선거를 주장하며 개표를 방해했다. 애리조나주 마리코파카운티 선거관리위원회 건물 앞에는 트럼프 지지 시위대 100여명이 모여 “4년 더” 등의 구호를 외쳤고, 피닉스 시청 인근에서는 지지자 수십명이 “우리 표를 보호하자!”면서 개표 중단을 요구했다. 펜실베이니아에서는 흉기로 무장한 괴한 2명이 대형트럭을 몰고 개표소가 위치한 컨벤션센터로 향하다 경찰에 체포됐다. 이들의 시위 수위가 어찌나 격했던지 “일부 선관위 직원들이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있다(AP통신)”라는 보도가 나올 정도다. 네바다주 클라크카운티 선관위 직원인 조 글로리아는 통신에 “시위대가 집까지 차를 타고 감시하듯 쫓아왔다”며 위급한 상황을 전했다.
승리가 유력한 바이든 후보 지지자들은 반대로 완전한 개표를 촉구하는 시위로 맞불을 놨다. 그러나 오리건주 포틀랜드에서 일부 시위대가 행진 도중 거리 상점 진열장들을 부수거나 경찰 향해 불붙은 폭죽을 던져 최소 12명이 체포되는 등 역시 평화 집회와는 거리가 멀었다. 뉴욕 맨해튼에서도 바이든 지지자 25명이 경찰에 붙잡히고 32명에게는 출두명령서가 보내졌다. 현지 경찰은 “시위대 중 일부가 흉기, 테이저건, 화약을 소지했고 거리에 불도 냈다”며 불법을 확인했다.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는 심지어 600명이 넘는 시위대가 고속도로까지 진출해 행진하다 조사를 받기도 했다.
온라인 공간도 전쟁터가 된지 오래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대선 부정을 기정사실화하며 집단행동에 나서는 등 점점 조직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페이스북에 개설된 ‘도둑질을 멈춰라(#StopTheSteal)’라는 페이지그룹은 이날 하루에만 36만명의 회원을 끌어 모았다. 그룹은 “투표의 진실성을 유지하기 위해 현장에는 ‘군대(boots)’가 필요하다”면서 조지아와 노스캐롤라이나, 펜실베이니아 등 경합주 시위대에 보낼 항공ㆍ숙박료를 모금하기도 했다.
페이스북 측이 폭력 조장을 이유로 계정을 삭제하자 트럼프 지지자들은 더욱 거세게 반응했다. 미 언론은 ‘도둑질을 멈춰라’ 측이 “페이스북이 바이든 지지자 그룹에도 같은 기준을 적용하는지 묻고 싶다. 차별적인 조치”라며 반발했다고 전했다. 페이스북에는 비슷한 이름의 계정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트위터에도 ‘도둑질을 멈춰라’라는 해시태그가 빠르게 퍼져나가는 중이다.
"지지자 침묵하지 마라" 폭력 부추긴 대통령
트럼프 대통령은 국가 수장이 한 술 더 떠 이런 증오 여론을 부채질하고 있다. 그는 이날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선거가 조작되고 있다” “지지자들이 침묵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등 사실상 집단 투쟁을 선동하는 발언을 거침 없이 쏟아냈다. 결과는 트럼프 의도대로 흘러갈 듯하다. USA투데이는 “대통령 발언이 이미 개표 결과에 불만을 갖고 있던 지지자들의 극렬 시위를 더 부추길 수 있다”고 했다. 로이터통신은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시위를 하고 있던 트럼프 지지자들이 회견을 지켜보고 환호성을 질렀다”고 전했다.
당연히 바이든 측도 맞대응에 나설 태세다. 이날 밤 시카고에선 바이든 후보를 찍은 유권자들이 트럼프타워를 향해 행진하면서 “모든 표를 개표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필라델피아, 디트로이트 등 주요 도시에서도 트럼프 퇴진을 주장하는 움직임이 계속됐다. 네바다 클라크카운티 개표소 앞에서는 양측 시위대가 대치하며 상대를 규탄하는 등 일촉즉발의 상황도 연출됐다.
이미 대선 전 여론조사에서부터 분열과 대립은 예견됐다. 지난달 로이터와 여론조사업체 입소스가 진행한 조사 결과를 보면 바이든 지지자의 43%, 트럼프 지지자의 41%는 “지지하지 않는 후보가 당선되면 승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폭력을 불사하겠다는 답도 각각 트럼프 16%, 바이든 22%나 됐다.
일각에서는 온ㆍ오프라인에서 양측 충돌이 장기화할 경우 미 전역이 내전에 준하는 대립 사회로 전락할 것이란 섣부른 의견도 내놓는다. 실제 이날 폐쇄된 페이스북 ‘도둑질을 멈춰라’ 그룹에서 일부 회원들은 ‘내전(civil war)’이라는 단어를 직접 언급했다고 한다. 또 폭스뉴스는 선거 당일인 3일 “올 들어 지난달까지1,860만정의 총기가 팔렸고, 10월 판매량만 190만정으로 전년 동기 대비 65% 급증했다”고 보도했다.
고어ㆍ롬니 "모든 표 집계해야"
트럼프 대통령의 폭주에 앨 고어 전 부통령과 밋 롬니 공화당 상원의원 등 중진 정치인들도 비난 대열에 합류했다. 고어 전 부통령은 미 NBC방송 인터뷰에서 “내가 20년 전 옹호했던 가장 중요한 원칙은 합법적으로 투표된 모든 표를 집계해 미국의 뜻에 따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2000년 대선 당시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과 플로리다에서 접전 끝에 패하자 투표 재검토를 요구했고, 연방대법원이 부시의 손을 들어주자 깨끗이 물러났다. 트럼프 대통령과 앙숙 관계인 밋 롬니 공화당 상원의원 역시 이날 “모든 표를 세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라는 바이든 후보의 말을 트윗하며 대통령의 선거 조작 주장을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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