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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좋았던 일들

입력
2020.11.06 22:0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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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오랜만에 일곱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반갑게 오가는 인사 사이로 각자 준비한 음식들이 거실 창가 기다란 테이블에 하나둘 놓였다. 돼지보쌈, 멘보샤, 토마토 스튜, 물회, 월남쌈. 요리에 영 젬병인 청년 두 명이 배달시킨 탕수육과 치킨까지 도착할 즈음, 집주인인 나는 미리 해둔 밥과 국을 상 위에 올렸다. 갓 도정한 햅쌀밥과 고향에서 올라온 아욱을 넣어 끓여낸 된장국이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1단계로 하향조정되기는 했어도 밖에서 저녁을 먹고 수다 떠는 게 영 미덥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일행 중 한 명이 포틀럭(potluck)을 제안했다. 각자 음식을 한두 개씩 가져와 같이 식사하고 이야기하는 것. 장소는 제일 나이 많은 내가 제공하기로 했다. 아이디어를 낸 친구는 멘보샤와 토마토 스튜를 특급 요리사 뺨치게 만들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그러면서 막 튀겨낸 멘보샤랑 뜨끈한 스튜를 먹고 싶으면 주방까지 내놓으라고 내게 요구했다.

한 상 가득 차려진 식탁 앞에서 우리는 모처럼 맘 편히 먹고 이야기하며 웃었다. 갓 튀긴 멘보샤는 어디에 내놔도 꿀리지 않을 만큼 근사했다. 세 명의 30대 초반 친구들은 가장 성의 없는 배달음식이 자기들 입에는 최고라며 탕수육과 치킨을 집중 공략했다. 그 가운데 창업 1년 차 회사 일에 매달리느라 집밥을 거의 못 먹고 지냈다는 청년이 “맛있다. 진짜 맛있다!”를 연발하며 밥과 아욱국을 두 그릇이나 비워줘서 나는 뿌듯했다.

정신없이 음식을 해치운 후 포만감이 몰려올 즈음, 멘보샤를 튀겼던 친구가 좌중을 둘러보며 물었다. “자, 특이했던 2020년도 슬슬 저물어가고 있어요. 모두 고단했겠지만, 그래도 각자 한두 가지씩 좋았던 일들을 떠올려볼까요?” IT 회사에 다니는 30대 여성이 즉각 말을 받았다. 10개월 중 8개월을 재택근무로 대체했다고, 일 처리 속도가 2배쯤 빨라지는 걸 보며 동료들이 전부 놀라고 있다고. “그보다 좋은 건 카드 결제액이 작년 대비 30%로 떨어졌다는 점. 옷과 화장품 살 일이 거의 없고, 저녁 약속까지 줄다 보니까 통장 잔고가 저절로 늘어나요.” 미국 유학 중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했다가 코로나-19로 인해 발이 묶인 친구는 가을학기 수업을 여기서 온라인으로 듣는 게 사실은 너무 좋다고 말했다. 멘보샤 친구는 코로나-19 덕에 자연과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인생관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바이러스가 나를 겸손한 인간으로 재탄생시키고 있다고." 제약회사 연구원으로 일하는 40대 남성은 저녁마다 불러내던 친구들의 전화가 끊겨서 살 것 같다고 했다. “어디 가서 대놓고 할 말은 아니지만, 나에겐 코로나 시대가 영 나쁜 것만도 아니야.” 말수 적은 그가 천천히 중얼거릴 때 우리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정신없이 웃는 사이 내 차례가 왔다. 흠, 나는 지금이 무지하게 좋았다. 철철 흘러넘치는 금요일 저녁 시간에 사랑하는 이들과 마주 앉아 맘껏 먹고 말하고 웃는 일. 젊은 친구들은 나이 든 티 작작 내라며 나를 구박하면서도, 올해가 완전히 가버리기 전에 오늘 같은 저녁을 한 번 더 갖자고 입을 모았다.

자정 즈음 돌아가는 친구들에게 남은 음식과 지난 6월에 담가두었던 매실청 한 병씩을 포장해 건넸다. 멘보샤가 씩 웃더니 기어이 한마디를 보탰다. “하, 청승도 팔자셔. 노친네, 굿나잇!”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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