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예술의전당 리사이틀 현장
4일 오후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앞. 아이돌 그룹 콘서트장 마냥 수많은 사람들이 수십여 m의 줄을 길게 늘어섰다. 코로나19 사태로 이런 저런 공연이 취소되고 연기되면서 좀처럼 보기 어려웠던 풍경. 오랜만에 사람들이 모여든 건 오후 3시, 피아니스트 조성진(26) 때문이었다. 그저 공연을 보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공연 전에 프로그램북은 물론, 그의 앨범까지 사기 위해 장사진을 쳤다. 진작에 매진된 공연이라, 콘서트홀 1~3층 좌석이 금세 가득 찼다.
관객들이 이 기나긴 줄을 참고 기다린 것은, 코로나19로 공연에 목말랐기도 하지만, 쇼팽 콩쿠르 우승 5년이 지난 시점에서 조성진의 음악적 성장을 확인해보고팠기 때문이기도 하다.
공연 첫 곡은 다소 생소한 슈만의 '숲의 정경'. 독일 극작가 하인리히 라우베의 '사냥일기'에서 영감을 받아 1849년에 완성한 작품이다. 9개 곡으로 숲속 풍경을 묘사한 곡이다.
손수건으로 건반을 슥 닦은 조성진은 씩씩한 손놀림으로 숲 속으로 관객을 안내했다. 산책 중간중간 그의 손가락에서 사냥꾼의 총소리와 몽환적인 새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지막 곡 '이별'에서는 조성진의 설명대로, 장조(B플랫)의 힘찬 분위기 속에서도 씁쓸함이 묻어 났다. 정신적 문제로 고통이 심했던 시기에 쓴 곡이라 그런 느낌이 더 강했다.
숲을 빠져나온 조성진은 폴란드 출신 작곡가 카롤 시마노프스키의 '마스크'를 연주해보였다. 이번 전국 투어에서는 날짜마다 연주곡이 다르다. 그 중에서 유일하게 모든 공연장에서 다 연주하는 곡이 시마노프스키의 '마스크'다. 시마노프스키 자체도 한국에선 생소한데, '마스크'는 시마노프스키를 안다는 음악인들에게도 낯선 곡이다. 유럽 무대에서도 연주되는 일이 거의 없다 한다. 그럼에도 이 곡을 고른 건 "뛰어난 작곡가의 유명하지 않는 곡"을 자주 들려줘서 "클래식의 대중화가 아니라 대중의 클래식화"를 꿈꾼다는 조성진의 뚝심이다.
드뷔시와 라벨의 인상주의 음악 영향을 받았다는 설명답게 '마스크'는 화성의 변화가 귀에 꽂히는 곡이었다. 20여분 동안 폭풍과 햇살이 몇 번이나 교차했다. "이 부분이 주제부"라고 딱 꼬집을 수 없는 곡이어서, 관객 상당수가 연주 내내 긴장한 표정들이었다.
피날레는 슈베르트의 '방랑자 환상곡'으로 장식했다. 최근 앨범 '방랑자'의 타이틀곡으로, 지난 4월 온라인 공연 때보다 훨씬 성숙하게 들렸다. 초절정의 기교로 유명한 곡이지만 조성진은 별스럽지 않은 듯 풀어냈다. 고성능 스포츠카의 변속기처럼 화성의 대위법적 전개가 물흐르듯 이어졌다.
공연은 격정적이었다. 조성진은 스프링처럼 튀어 오르기도 했고, 머리카락이 다 헝크러질 정도로 60여분간 몰입에 몰입을 거듭했다. 관객은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조성진은 공연 때마다 푸짐한 앙코르를 선보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날만큼은 팬들조차 별로 보채지 않는 분위기였다. 바로 3시간 뒤 저녁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전은 조성진 스스로가 만들어냈다. 커튼콜 뒤 다시 피아노 앞에 앉은 조성진이 조심스레 저음부 건반을 누르자, 객석에서는 소리를 잔뜩 죽인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조성진이 선택한 앙코르 곡은 리스트의 소나타. 연주 시간만 30여분에 달하는, 더구나 저녁 공연의 마지막 곡으로 예정된 작품이었다. 메인 요리를 배불리 먹었는데 또 다른 메인 요리를 내놓은 셈이다. 자신의 연주를 보기 위해 코로나19를 뚫고 공연장을 찾아준 팬들에 대한 감사의 표현, 그 자체였다.
이 뜨거운 조성진의 무대는 9일 춘천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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