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대학 입학 전 몇 달 간 신문 배달을 했다. 새벽녘 두 세시간 일하면 그만인 아르바이트였지만 아직도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그 동네 아파트 단지엔 유독 5층짜리 저층동(棟)이 많았다. 5층까지 네 번을 걸어갔다 와야 한 개 동이 끝났다. 일을 마칠 즈음엔 다리가 후들거렸다. 한 부에 몇 백 원인 신문을 꼭 집 앞까지 배달해야 하나, 원망 섞인 푸념이 절로 나왔다. 그만큼 신문 구독자가 많던 시절의 얘기이기도 하다.
얼마 전 온라인 쇼핑몰에서 2리터짜리 생수 1세트(6개)를 주문하려다 문득 그 시절 생각이 났다. 만원도 안 되는 가격에 12kg이 넘는 무게를 집 앞까지 들고 와달라고 하는 게 마음에 걸렸다. 심지어 배송비도 무료이고 다음날 새벽 도착이 보장되는 상품이었다. 그나마 엘리베이터가 있는 아파트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소비자들 사이에서 ‘착한 배송’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새벽이나 당일 배송은 자제하겠다고 선언하고, 택배기사를 위해 간식을 준비했다는 미담들도 전해진다. 올해에만 13명의 택배기사가 과로 등의 이유로 숨졌다는 소식을 접한 시민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자성과 애도를 표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이 죽음의 행렬은 안타깝고 황망하다. 택배기사의 살인적 노동환경이 도마 위에 오른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2016년 이후 해마다 과로사로 추정되는 죽음이 잇따랐다. 택배노조가 집계한 택배 기사의 주 평균 노동시간은 약 71시간에 달한다고 한다.
반면 택배회사들은 전례 없는 호황을 누리는 중이다. CJ대한통운은 올해 상반기 영업이익이 830억원으로 작년 상반기(232억원)보다 세 배 넘게 늘었다. 한진의 택배 부문 역시 상반기 영업이익이 223억원으로 작년(116억원)보다 두 배 뛰었다.
이 역설적 상황에는 정부의 잘못도 크다. 국토교통부는 2017년 3명의 택배 노동자가 잇따라 숨지자 택배 분류 작업과 배송 작업을 분리하고, 산재보험을 확대하는 방안 등을 내놓았다. 지금 택배 노동자들이 요구하는 해법이 3년 전에 이미 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 방안은 현실화되지 못했다. '사람이 먼저'라던 정치인이 대통령이 됐는데도, '사람이 먼지'처럼 쓸려가는 것을 막지 못한 것이다. 김현미 국토부 장관은 23일 국정감사에서 “늦지 않게 대책을 내놓겠다”고 했지만, 늦어도 너무 늦었다.
‘착한 배송’도 좋지만, 거기에 그쳐선 안 된다. 문제의 핵심은 배송이 늘어나서가 아니라, 노동에 대한 값어치가 제대로 매겨지지 않는 전근대적인 문화와 허술한 제도에 있다. 힘들고 어려운 노동을 하는 사람에게 더 많은 대가가 주어지고, 배송비로 얻은 이익은 노동을 담당한 이들에게 공정한 비율로 배분돼야 한다. 이것이 내가 아는 자본주의다.
다시 옛날 얘기로 돌아가면, 사실 배달 일을 할 때 힘들었던 건 5층짜리 아파트가 아니었다. 신문지국장은 매번 돈을 늦게 입금하더니 일을 관둔 후 마지막 월급을 주지 않고 수개월을 버텼다.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순진한 청년은 임금을 체불하는 악덕 사업주를 신고하기는커녕 지국 앞을 서성이며 혼자 속앓이를 했다. 수백 번 5층을 오르락 내리락 한 노동의 대가를 왜 당당히 요구하지 못했을까. 그로부터 20년 넘게 세월이 흘렀지만, 세상이 크게 나아지진 않은 거 같다.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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