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구독자를 모집하고 매일 한 편씩 글을 보내주는 ‘일간 이슬아’로 이야기의 신기원을 연 이슬아(28). 농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청인 자녀의 이야기를 담은 ‘반짝이는 박수소리’와 베트남 전쟁을 다룬 ‘기억의 전쟁’ 등 다큐멘터리를 만든 이길보라(30). 원인불명 통증과 함께 사는 삶을 솔직하게 기록한 이다울(26).
각자의 자리에서 가장 인상 깊은 이야기꾼의 행보를 보여온 세 명의 90년대생 여성 창작자들이 22일 저녁 서울 상수동의 한 카페에서 모였다. 이 세 작가는 최근 두달 사이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이길보라), ‘천장의 무늬’(이다울), ‘부지런한 사랑’(이슬아)을 내놨는데, 이걸 한번 한데 모아 이야기해보고자 '합동 북토크'를 마련한 것.
비슷한 시기에 책을 출간한 90년대생 여성 작가라는 것 외에도 이들에겐 공통점이 하나 더 있다. 같은 스승을 모셨다는 것. ‘대이야기 시대의 문을 열며’라는 주제로 열린 이날 북토크는 그들의 특별한 스승 ‘어딘’(김현아)의 사회 아래, 각자의 글쓰기에 대해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요즘 한창 주목받는, 책을 낸 여성작가들의 모임이었으니 '글쓰기를 잘 하는 비법' 같은 것이라도 나올 법 했건만 모임은 의외로 화두로 시작됐다. 글쓰기 스승 어딘은 “웬만해서는 쓰지 말라고 한다”는 화두를 던졌다.
“(글쓰기를 가르치고 배우는) 글방을 하고 있긴 하지만, 쓰지 않고 사는 삶이 좋은 삶이라고 늘 말해요. 하지만 참 이해할 수 없게도 예나 지금이나 글을 쓰려는 이상한 사람은 늘 존재하고, 특히 진지하게 글쓰기를 하려는 십대들이 있다는 게 놀랍죠.”
이슬아는 대안학교를 졸업했고, 이길보라 역시 고교 1학년 때 자퇴 후 스스로 삶과 공부의 방향을 정하는, 자칭 '로드 스쿨러(road schooler)'가 됐다. 세 작가 모두 십대 후반부터 이십대 초반 무렵까지 청소년 여행학교 ‘로드 스꼴라’와 ‘어딘 글방’ 등 흔히 말하즌 '비제도권 교육'을 통해 글쓰기를 배웠다. 어딘은 “작가로 만들고자 했던 건 아니고, 다만 세상을 살아가며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더듬이로 글쓰기를 사용했으면 하고 바랬다”고 말했다. "어떤 한계도 경계도 없이 하고 싶은 얘기를 끝까지 써보고 서로 정직하게 비평하는 경험"을 주는 게 목표였다.
하지만 '글 쓰는 이상한 사람'이었던 셋은 10여년 뒤 기어코 작가가 되어버리고야 말았다. 그것도 주목받는 작가가.
“나보다 잘 쓴 사람의 글을 보며 자격지심을 느끼는 게 글방의 일이었어요. 모두에게 n분의 1의 발언권이 주어졌던 글방에서는 스승뿐 아니라 모두가 동료이자 라이벌이었죠.”(이슬아)
“글방에 늦게 들어간 편이었는데, 어딘이 ‘깍두기처럼 앉아있지 말라’고 하더군요. 치열한 비평을 통해 부서지고 깨졌던 그때의 경험이 돌이켜보면 참 좋았어요.”(이다울)
모두가 동등한 글방이었기에 교사에게 ‘님’을 붙이지 않았고, 나이 터울과 상관없이 모두가 친구였다. 어딘은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언젠가 이들이 나의 동지가 될 것이라는 신뢰가 있어야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그건 이야기가 지닌 평등한 힘이다. 덕분에 세 작가는 ‘내 이야기에만 열 올리는 글쓰기'가 아니라 '타인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는 통로로서의 글쓰기'를 깨우쳤다.
이다울의 '천장의 무늬'에는 병원 가봐야 똑 떨어지는 병명이 나오지 않지만 늘 아픈, 만성질환자들 얘기가 담겨 있다. “눈에 띄지 않는 만성질환자들 얘기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연재를 시작하자 숨어있던 분들로부터 ‘나도 그렇다'는 응답이 왔죠.” 이길보라는 네델란드 영화 유학 시기 이야기를 담은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를 냈다. “저만 행복한 글과 영화를 만들 게 아니라, 사회에 꼭 필요한 글과 영화를 만들 거라는 믿음이 있었어요. 한국 사회에는 더 다양한 이야기가 필요하고,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이슬아의 '부지런한 사랑'은 글방을 운영하면서 겪은 아이들 목소리가 담겨져 있다.
이들의 이야기는 계속 커질 것 같다. 사적인 일기로 출발한 '일간 이슬아'는 다양한 인물 인터뷰 등 세상의 이야기를 담기 시작했다. 이길보라는 할머니, 어머니, 자신으로 이어지는 3대의 낙태 경험을 다룰 예정이다. 이다울 역시 청소년들과 글쓰기 수업을 통해 “사적인 이야기가 가장 정치적인 이야기”임을 계속 발견해나갈 생각이다. 이들은 '대항해의 시대'에 빗대, 그걸 일러 '대이야기의 시대'라 불렀다. 그건 어디 하나 빠지는 곳 없이 저마다의 목소리가 고루 울려퍼지는 시대를 향해 나가겠다는 다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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