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정조의 공포정치’ 출간 앞둔 변원림 박사
“오늘날 정조가 성군(聖君)으로 칭송되고 있는 현상은 어이없는 일이에요. 정조는 폭군(暴君)이었습니다.”
도발적인 우상 파괴다. 조선 제22대 왕 정조가 누구던가. 개혁 군주의 아이콘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롤 모델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 인물이 정조다. 지난달 초 추석을 앞두고 페이스북을 통해 추천한 책 4권 중 하나가 ‘리더라면 정조처럼’이었다. 지난 2017년 5월 대선이 치러지기 직전 마지막 TV 연설 때 문 대통령이 계승하겠노라고 거론한 게 ‘정조의 개혁 정책’이었다. 문 대통령뿐 아니다.
지난 대선, 총선 승리를 일궈 낸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진보 20년 집권론’을 주제로 주간지 시사인과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에서 이 전 대표는 “김대중과 노무현을 빼면 수구보수 세력이 210년을 집권했다”고 말했는데, 수구보수 세력이 집권을 시작한 시점으로 언급한 게 “정조 대왕이 돌아가신 1800년”이었다. 그러니까 정조는, 개혁과 진보의 절대적 상징이다.
하지만 정말 정조가 개혁 군주였을까. 재독(在獨) 사학자인 변원림(72) 박사는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부인한다. 정조가 진짜 성군이었는지 몇 년간 추적 작업을 벌인 끝에 그 결과물을 ‘정조의 공포정치’(가제)라는 단행본으로 이르면 올 연말에 출간할 예정이다.
한국일보는 원고를 미리 입수했고, 정조가 과연 폭군인지 변 박사와 이메일 등으로 대화를 나눴다. 그는 “나는 이미 일흔 살이 넘었고, 한국을 떠난 지 수십 년이 지난 재야 학자”라며 “진영 논리, 유불리를 따지거나 눈치 볼 것 없이 내가 연구한 그대로를 담았다”고 말했다.
변 박사가 그려 낸 정조의 진짜 모습은 ‘스스로를 끊임없이 성군으로 연출하고자 했으나 결코 성군이 되지 못한 위선자’다. 그는 “정조가 개혁 군주라는 건 오늘날 학자들의 희망사항이지 사료에 근거한 게 아니다”라며 “정조는 과거를 지향한 보수반동적 군주”라고 평가했다. 정조가 당대에 유행하던 연암 박지원풍의 문장을 기존 고문(古文)들로 되돌려야 한다며 일으킨 ‘문체반정’이 그가 드는 예다. “문체반정을 통해 정조가 조선인의 사고를 주자학의 감옥에 가둬 조선을 명나라의 축소판으로 화석화했고, 조선인들이 변화하는 사회에 대응할 능력을 상실하게 했다”는 것이다.
정조에게서 평등과 민주주의 사상을 찾아내려는 시도도 무망하다. “계급사회의 정점에 서 있는 왕이었던 데다 계급사회의 윤리학인 주자학을 신봉했던 만큼 정조야말로 계급의식이 투철한 자였다”는 게 변 박사의 주장이다. 정조가 경제 민주화를 위해 신해통공(辛亥通共)을 전격 실시, 모든 백성이 자유롭게 장사할 수 있게 해 줬다는 식의 얘기도 부인했다. 그는 “정조는 평민들이 상공업을 하며 떠돌아 다니거나, 광산을 업으로 삼아 한 곳에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을 위험하게 여겼다”며 “그 때문에 정조는 모든 산업을 억제하고 평민들을 본 고장에 묶어 두려 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의 근거는 정조의 ‘언행 불일치’다. “관찬 사료를 조금만 주의깊게 읽어 봐도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에서 정조가 ‘한다’, ‘했다’는 것과 상반되는 내용이 수없이 발견된다”고 그는 지적했다. “정조는 정청(政廳)에서는 성군의 모습을 연출하며 뒤로는 아무도 자신의 잘못을 말하지 못하게 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자들을 폭력을 동원해 제재했어요. 폭군의 행태와 다름없죠.”
가령 ‘궁방(궁에 속한 전토)’ 문제만 해도 그렇다. 정조는 즉위년에 궁방 세금을 걷는 ‘궁차’의 횡포를 막겠다고 선언한다. 조정에서 궁차 문제가 거론되면 궁차를 엄벌해야 한다는 얘기를 하곤 했다. 하지만 실제 궁차의 횡포를 호소하는 백성들이나, 그런 호소를 잘 듣고 조정에다 보고하는 관리들에게 벌을 준 사람이 정조였다.
실제 정조 즉위년 11월 궁방전을 경작하는 농민들이 왕이 지나가는 행차 앞에서 궁차의 횡포를 호소하자 정조는 ‘그런 작은 일로 감히 왕의 가마 앞에 나서는 건 기강이 없는 것’이라며 엄중한 처리를 지시했다. 정조 3년 6월 궁차들의 전횡 소문을 들은 영남 암행어사 황승원이 그 사실을 보고하자, 정조는 도리어 황승원을 파직했다.
이런 주장들은 한국 역사학계 일부 풍토에 대한 비판으로도 이어진다. 사료를 전체적으로 읽어 나가며 비교 분석, 비판하고 실제로 그랬는지 진실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좋은 말이 있으면 그걸 딱 떼어 와서는 ‘우리 조상은 이렇게 훌륭했다’고 하고 만다는 것이다. 궁방 문제만 봐도 ‘민폐를 걱정한 정조’만 말하고 ‘실제로는 거론 못하게 한 정조’ 부분에는 입을 닫아버린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개혁 군주 정조를 거론할 때 자주 함께 언급되는 화성 건설, ‘장용영’ 설치 등에 대해서도 변 박사는 비판적이었다. 그가 보기에 그건 수도로 쓸 대동 도시 건설이나, 군비 절약을 위한 군사 개혁과 무관한 일이었다. 그보다는 철저히 자신의 안위를 위한 조치였다고 해석했다. 변 박사에 따르면 정조가 화성을 쌓고 장용영을 키운 건 내란이 걱정돼서다. 정조가 두려워한 게 외적보다 되레 백성이었다는 얘기다.
부작용은 단순 낭비에 그치지 않는다. 국가 재정 위축으로 이어진다. 변 박사는 “사료를 보면 정조가 장용영 재산을 쌓으려 국가 재원을 고갈시키고 민생 생활 기반을 빼앗았다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며 “전국에서 아사(餓死)해 가는 백성들로부터 재산을 긁어 모아가며 자신의 친위군을 강화했지만 결과적으로 민심을 잃는 바람에 내란 위험을 더 키웠다”고 비판했다.
그래서 정조에 대한 변 박사의 혹평은 서늘할 정도다. “입으로는 항상 백성을 위하느라 잠도 못 자고 노력한다 했지만 실제 정조는 자신의 신변 보호와 후세에 있을 자신의 명성 말고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었던 인물입니다.”
이런 결론, 그러니까 이처럼 정조에 대한 철저한 부정은, 변 박사 자신도 예상치 못한 결론이었다고 했다. 그의 연구 출발점은 ‘조선은 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느냐’였다. 그러니 19세기 조선사를 들여다보기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 ‘대체 정조가 어떻게 했길래’라는 질문에 도달했고, 정조 관련 기록을 몇 년 간 샅샅이 읽어 내려갔다.
“19세기 전반기에 백성을 유랑하게 하고 이들이 폭동을 일으키도록 만든 최대 원인이 국가가 평민에게 주는 고리대의 강제 차관인 ‘환곡’이었음을 알게 됐어요. 그래서 대체 환곡이 언제부터 평민의 질곡이 됐는지 거슬러 올라가 보니 영ㆍ정조 때더라고요. 오늘날 백성을 위해 잠도 안 자고 일했다고 칭송되는 정조에게서 그 문제들이 시작됐음을 알고 크게 놀랐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분식ㆍ윤색된 역사가 어떻게 지금껏 유지돼 온 걸까. 대중 영합과 학계의 권위주의가 배경이라는 게 변 박사의 진단이다. “조상들이 훌륭했었다고만 하고, 지나간 사실을 오늘날의 필요나 구미에 맞게만 서술하면 오늘날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알 수 있는 길이 차단됩니다. 역사를 정확히 알아야, 오늘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고요. 한국 학계가 좀 더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장이 됐으면 합니다.”
변원림 박사는
현재 독일에 살고 있는 독립 역사 연구자다. 고려대 사학과에서 학사ㆍ석사 학위를 취득한 뒤 독일에 유학해 에어랑엔대 사상사학과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우리나라가 왜 일본의 식민지가 됐는지 알고 싶어 19세기 조선 멸망사 연구를 시작했고, 그 결과를 담은 책이 2012년 ‘순원왕후의 독재와 19세기 조선사회의 동요’다. 출간을 앞둔 ‘정조의 공포정치’는 그 연장선상에 있다. 사료의 무비판적 해석이 연구 대상의 우상화로 이어진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2008년 출간한 ‘연산군, 그 허상과 실상’에서는 거꾸로 연산군이 학계 주류 해석대로 정말 폭군이었는지를 파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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