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이름. 다시 마르크스다. 오류투성이의 실패한 이론가 혹은 역사의 진보를 추동한 위대한 사상가. 극명하게 갈리는 후대의 평가와 상관 없이 2020년 사람들에게 마르크스는 그저 한 물간 인물일 뿐이다.
하지만 학계에선 대우가 다르다. 대세가 될 정도로 열광적이지는 않지만, 드문드문 마르크스를 통해 세상을 반추해보고, 풀리지 않는 답을 구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마르크스를 거듭 소환하는 이들은 단언한다. 환경파괴, 팬데믹 등 자본주의가 낳은 병폐들이 인류를 위협할 수록 마르크스의 가르침은 유효하다고 말이다. 마르크스를 다룬 책 두 권도 이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간됐다.
신(新) 혁명 주체 '공공성 지향 도시 노동자’
흔히들 마르크스는 경제 구조 관점으로만 사회를 분석했다고 생각한다. 오해다. 마르크스 전문가들은 마르크스가 현대인들이 직면한 생태, 환경, 여성 억압에 대해서도 고민해왔다고 말한다. ‘인류세 시대의 맑스’(창비)도 그런 맥과 닿아 있는 연구다.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도시학자인 마이크 데이비스는 수명이 다했다고 여겨지는 마르크스의 연구를 재조명하며 그 속에서 인류세 위기의 해법을 제시한다.
저자는 먼저 새로운 혁명의 주체로, 공공성을 갖춘 ‘비공식 프롤레타리아’를 내세운다. 마르크스의 희망과 달리 현대의 노동자는 단일하지 않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뉜 노동 세계 역시 불평등하다. 저자가 주목한 건,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노동자 계층, 공식적 노조와 정규직 지위를 확보하지 않은 비정규직, 플랫폼 노동자들이다.
이들이 만들어나가는 노동운동의 목표 역시 과거와는 달라져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단순히 분배적 정의나 수입의 공평, 혹은 번영의 공유”를 넘어선 “성역할, 여성 참정권, 인종적 편견, 아이의 돌봄 등에 대해 사회주의적 태도를 구축하는 공공의 삶”이 돼야 한다는 게 그의 핵심 주장이다.
또 다른 대안은 ‘도시’에서 찾는다. 도시의 폐해와 부작용에 몸서리치는 환경주의자들이 들으면 기겁할 발상일지 모르지만, 저자는 “전 인류가 자가용 두 대와 잔디밭이 딸린 교외 주택에서 거주하려면 여분의 지구가 몇 개 더 필요할 것”이라며 교외보다, 공공서비스와 공공자원이 구축돼 있는 도시가 기후위기를 효율적으로 막는데 훨씬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물론 전제는 있다. 사적 소비와 부를 추구하기 보다 '공적 풍요'와 '공적 호사'를 우선시하는 도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이를 위해선, ‘비공식 프롤레타리아’들이 참여하는 민주적 통제가 중요하다. 그래야 투기꾼들과 개발업자들의 놀이터가 아닌 인종과 소득에 관계 없이 공급되는 공공주택과 비영리주택이 세워질 수 있다. 이상적이고 추상적인 얘기다. 하지만 저자는 확고하다. “자본주의의 모순이 집약된 초거대도시에서 일으키는 비공식 프롤레타리아들의 협력과 공공의 삶이야말로, 역설적으로 불평등과 생태위기에 직면한 인류를 구원해줄 유일한 설국열차다.”
자본주의 타도가 아닌 '질서자본주의'로
2008년 독일에서 출간된 ‘추기경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저자, 라인하르트 마르크스는 마르크스와 성도 같고 덥수룩한 수염마저 빼닮았다. 책의 원제마저 'Das Kapita'이다. 다른 점도 있다. 마르크스는 종교를 극도로 혐오하고 종교의 종말을 부르짖던 무신론자였지만, 저자 마르크스는 뮌헨과 프라이징 대교구의 대주교를 거쳐 추기경에 임명된 유신론자라는 거다. 저자는 스스로를 '예수의 마음을 지닌 마르크스주의자'라 칭한다.
자본주의에 대한 생각도 차이가 난다. 마르크스가 사적 소유 철폐, 부르주아 자본주의 타도 등을 주창했다면, 저자는 시장경제 체제를 허물기보다는, ‘질서자본주의’로의 진화를 제안한다. 추기경 마르크스가 말하는 신(新) 자본론의 핵심이다.
질서자본주의가 지향하는 바는 공동선의 추구다. 자유와 경쟁이라는 원칙은 특권, 예외, 반칙을 허용하지 않는다. 무조건적 사회복지가 아니라 자기책임성과 참여에 근거한 분배와 일자리 정책을 논한다. ‘제도화된 연대성’ 추구다. 궁극적 목표는 인간 존엄성을 지켜내는 일이다. 저자는 자본주의를 없애기 보다, 자본주의의 질서를 지켜내 인간에 봉사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이제 평안히 쉬어야 한다.” 추기경 마르크스는 마르크스에게 쉼을 권한다. 하지만 인류가 위험에 처할 때마다 마르크스는 또 다시 불려나올 거라는 걸 모를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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