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베이징 문화여행 ③ 매란방 고거와 경극
1791년 청나라 건륭제가 팔순을 맞이했다. 안후이성 남부 웅촌(雄村)의 극단이 이름까지 경승반(?升班)으로 바꾸고 베이징으로 향했다. 그야말로 축하 사절단이었다. 준비한 무대극은 모두 8개, 황제와 황후는 물론 모든 비빈이 수렴 사이로 관람했다. 황제는 기뻐서 끊임없이 환호성을 질렀다. 수렴을 거두고 무대로 와서 감탄의 어조로 물었다.
“너희 연기를 도대체 무어라 부르는고?”
“저희 극단은 휘반(徽班)이오니, 당연히 휘희(徽?)라 하옵니다.”
베이징 일대에 일파만파 소문이 번졌다. 휘극(徽?)의 명성이 전국으로 퍼졌다. 공연을 마치고 베이징에 눌러앉았다. 이때 자리 잡은 휘주 극단은 4곳이었는데 모두 인기 폭발이었다. 세월이 흘러 자연스레 경극(京?)이 됐다. ‘베이징 오페라’는 황산 아래서 성장한 휘주 문화의 산물이다. 웅촌에 가면 죽산서원이 있다. 서원 옆에 당시 일을 기록해 자랑한다. 현대의 휘극과 경극이 똑같지는 않아도 밑바탕에 깔린 색채는 엇비슷하다.
경극을 관람하기 전에 꼭 찾아가는 고거가 있다. 매란방(梅?芳) 기념관이다. 전통 가옥인 사합원(四合院ㆍ가운데에 있는 마당을 담장과 건물이 사각형으로 둘러싼 형태)이다. 조각상과 가림벽을 지나 왼쪽으로 돌면 사랑채인 도좌방(倒座房)이 나온다. 매란방에 대한 자료 전시실이다. 매란방은 이원세가(梨?世家)에서 태어났다. 이원은 전통 무대를 연기하는 극단을 뜻한다. 대대로 배우 집안이었다. 자서전에 나오는 이야기와 사진이 전시돼 있다. 여덟 살에 연기를 배우기 시작해 열 살부터 무대에 올랐다. 열세 살 때부터 전문 경극학교인 ‘희련성(喜?成)’에서 수련했다. 경극을 함께 배운 친구들과의 단체 사진 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띈다.
10대 후반에 전문 배우로 무대에 올랐다. 이 시기가 되자 매란방은 정말 예뻐졌다. 여자보다 더 미모가 빼어난 얼굴과 자태다. 여자가 무대에 오르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여자 배역 배우를 화단(花旦)이라 부른다. 화단 배역 중에 푸른 옷을 입는 청의(?衣)가 있다. 그래서 여장 배우를 일컫는 대명사가 됐다. 베이징에 거주할 때 진행하던 테마여행 제목이 ‘청의를 찾아서’였는데 그럴듯했다.
사랑채와 본채 사이의 수화문(垂花?)을 지나 마당으로 들어선다. 정면에 북쪽을 향해 있는 정방(正房)과 동쪽과 서쪽에 상방(?房)까지, 전형적인 사합원 가옥이다. 매란방은 국내에도 영화가 소개될 정도로 유명한 경극 배우다. 자기 만의 곡조, 대사, 손동작, 움직임과 자세, 심지어 소품과 복장까지 새롭게 창조했다. 경극계에서는 매파(梅派)라고 부른다. 이원세가답게 아들인 메이바오쥬(梅?玖)도 경극 배우로 유명했다. 고거를 자주 찾다 보니 증손자와 만났는데 매란방을 만난 듯 기뻤다.
매란방 고거를 나와 서쪽으로 100m만 가면 호국사 샤오츠(小吃) 거리가 나온다. 서태후가 즐겨 먹었던 베이징 간식이 많다. 갈 때마다 아이워워(艾??)와 뤼다굴(?打??)을 먹는다. 건륭제는 위구르 민족의 비를 얻었다. 카슈가르까지 정복한 후 유부녀를 납치해 황제에게 바쳤다. 붙잡혀 온 여인이 황궁에 온 후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하자 어선방에서 남편인 아이마이티(艾?提)를 불러 간식을 만들라고 했다. 여인은 그제야 남편이 함께 온 줄 알고 맛있게 먹었다. 워(?)는 보금자리이니 남편의 정성이 담긴 서역 간식이다. 찹쌀떡과 똑같이 생긴 아이워워의 전설이다. 당나귀가 데구루루 구르는 모양을 딴 뤼다굴은 찹쌀가루를 재료로 소를 넣고 콩가루를 묻혀 김밥처럼 말아서 만든다. 콩이나 완두 등으로 만든 간식이 많다. 대체로 조금 달지만, 간식에 담긴 이야기를 먹는 셈 치면 먹을만하다.
호국사에서 남쪽으로 4km 이동한 후 동쪽으로 조금 가면 천안문광장이다. 광장 남쪽에 우뚝 솟은 성문이 있다. 고궁 앞에 있다고 해서 전문(前?)이라 부르는데 정식 명칭은 정양문(正??)이다. 베이징올림픽 전에 확장하면서 전문대가 입구에 큰 패방이 생겼다. 주변 건물도 새로 건축했으며 고풍스러운 분위기로 단장했다. 전문을 등지고 패방을 지난다. 조금 걷다 보면 오른쪽으로 골목이 있다. 옛날부터 상업 거리인 다스뢀(大??ㆍ글자대로 읽으면 ‘다자란’이지만 베이징 사람의 발음대로 표기)이다.
100년이 넘은 가게가 수두룩하다. 비단 가게 루이푸샹(瑞?祥)이 나타난다. 맹자의 후손이 산둥에서 창업했다. 1876년 가게를 이어받은 맹락천(孟?川)이 다스뢀에 진출했다. 유교 상인의 면모를 지닌 맹락천은 흉년이나 재해가 발생하면 구휼하고 빚도 탕감해주며 거상으로 성장했다. 월마트 창업자가 ‘동양의 한 작은 가게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자서전에 남겼다. 청부환전(????)이라는 고사 때문이다. 잠자리 비슷하게 생겼고 전설 속에 등장하는 곤충인 청부의 피를 지전에 묻히면 돌고 돌아 다시 손에 들어온다는 말이다. 곤충이라고 다 곤충이 아니다. 비단 가게는 모두 상(祥)이란 상호를 쓴다. 1949년 10월 1일 건국 행사 당시 게양된 오성홍기는 루이푸샹의 비단이었다. 비단이라고 다 같은 비단이 아니다. 당시 오성홍기가 전시돼 있다. 물론 모조품이다.
1669년 개업한 약국으로 우황청심환으로 유명한 퉁런탕(同仁堂), 1817년 모자 가게 마쥐위엔(?聚源), 1858년 신발 가게 부잉자이(步瀛?), 1908년 차 가게 장이위엔(?一元) 등이 줄줄이 성업 중이다. 1858년 톈진에서 문을 연 만두 가게 거우부리(狗不理)도 베이징에 진출했다. 콧수염을 기른 위안스카이가 서태후에게 진상하며 ‘그 어떤 음식도 거우부리에 미치지 않는다’고 했다는 만두다. 맛보다는 성의 또는 아부에 대한 칭찬이지 싶다. 거우부리 만두보다 위안스카이 뒤로 보이는 다관러우(大??)에 담긴 이야기가 백 배는 더 맛있다.
1905년 다관러우에서 중국 최초의 영화 ‘정군산(定?山)’이 상영됐다. 사진관을 운영하던 임경태는 당시 인기를 누리던 경극을 촬영ㆍ제작해 무료로 상영했다. 정군산은 정사 ‘삼국지’에서 촉나라 장군인 황충이 조조의 심복 하후연을 물리친 장소다. 산시성 한중(?中)에 가면 황충이 직접 칼로 하후연의 배를 갈랐다는 도벽(刀劈) 조각상이 있다.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가 원래 더 재미있다. 황충을 연기한 경극 배우 담흠배(??培)는 60세였다. 황충처럼 노익장을 과시해 30분가량의 영화가 탄생했다. 영화를 관람한 관객은 감동의 물결을 이뤘고 경극 속 노래를 제창했다고 전해진다.
후퉁은 골목이라는 몽골어다. 베이징이 원나라의 수도가 되면서 주민이 늘었고 그만큼 골목도 많아졌다. 셀 수 없이 많아 지금도 이름이 있는 후퉁만 1,000여 곳이다. 다스뢀에서 걸어서 서남쪽 10분 거리에 바이순후퉁(百?胡同)이 있다. 골목 너비는 5.7m이고 길이는 245m다. 건륭제 생일에 왔던 휘반의 주요 거주지였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머무르자 경극 배우의 거주 중심이 됐다. 그들의 삶이 녹아있는 공간이었다. 매란방도 사숙했고 부근에 담흠배도 살았다.
북쪽으로 10분 정도 걸으면 류리창(琉璃?) 동쪽 끝이다. 재미난 이름의 후퉁이 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이 열리는 동안 후퉁을 답사하다가 알게 된 이츠다제(一尺大街)다. 가장 넓거나 좁은, 혹은 가장 길거나 짧은 골목을 찾다가 만났다. 한 자 정도로 짧은데 ‘다제’라니 구미가 당겼다. 현장에 가니 그 어떤 흔적도 없었다.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지나가는 주민에게 물어도 모른다는 말뿐. 1시간이나 흘렀다. 마실 나온 노인이 길을 기억했다. ‘여기 전봇대에서 십삼보(十三步) 가면 돼.’ 그때 왜 13걸음이라 들렸는지 모른다. 20m는 넘는다. 1965년에 양메이주세제(?梅竹斜街)로 편입됐으니 알 길이 없었다. 거의 10년이 지났을 듯싶다. 별 생각 없이 지나는데 바닥에 새긴 표지판이 보였다. 얼마나 반갑던지.
류리창은 유약 바른 도자기를 만들던 공장 지대였다. 청나라 시대에 과거 응시생이 모였고 이후 문인 교류의 중심이 됐다. 황궁의 궁녀와 환관이 물건을 내다 팔기도 했다. 한때 골동품 거리였지만 이제 온통 모조품만 진열된다. 유명한 서예가나 화가의 무대였다. 문방사우도 여전히 판매되며 지금도 화가와 서예가의 작품이 전시된다. 예전만 못한 류리창으로 쇠락해가는 모습이 안타깝다.
류리창에서 남쪽으로 700m 가면 사거리에 빨강 노랑 순백 검정의 경극 가면이 설치돼 있다. 전통 무대 그대로 경극을 공연하는 호광회관(湖???)이다. 1807년에 생겼다. 베이징에 비록 몇 개월만 머물렀지만, 삼민주의자 쑨원이 정치 강연을 했다. 희곡박물관이 있어서 경극 전시도 한다. 무대는 영화 ‘패왕별희’에 나오는 분위기와 닮았다. 사회자도 청나라 시대 옷차림이라 과거로 돌아간 느낌으로 경극을 관람할 수 있다.
호광회관에서 본 경극이 꽤 많다. 화단의 연기가 돋보이는 홍교증주(虹??珠)는 언제 봐도 흥미진진하다. 마치 매란방이 환생한 듯한 착각이 든다. 물론 지금은 남자가 여자 배역을 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선녀가 반듯한 공자를 흠모했다. 무지개다리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이 싹텄다. 선녀는 굳은 맹세의 징표로 구슬을 증정했다. 욕심이 난 신(神)이 군대를 이끌고 훔치러 왔다. 선녀도 군대를 동원해 물리쳤다. 선녀와 공자는 배필이 돼 행복하게 살았다는 전설을 경극으로 꾸몄다. 적과 싸우며 무기를 발로 차서 넘기는 장면을 보면 절로 신바람이 난다.
조금 알려진 테마도 있다. 백사전과 서유기다. 백사인 백소정이 항저우 서호에서 청년 허선과 만나 사랑에 빠져 부부가 된다. 허선을 살리기 위해 영지를 찾아 전투를 벌이는 이야기인 도선초(?仙草)다. 그림자극인 피영에서도 인기 있는 테마다. 서유기의 손오공에게 닥친 화염산 상황을 재현한다. 나찰녀와 우마왕과 싸워 파초선을 손에 넣는다. 부채를 빌린다는 차선(借扇)이란 제목으로 무대가 펼쳐지는데 익살스러운 장면이 많다. 이처럼 소설이나 신화, 전설 전체를 다루지 않고 한 대목만 가지고 온다.
500m 남쪽에 전문반점(前??店)이 있다. 중국집이 아니라 호텔이다. 1990년 문을 연 이원극장(梨???)이 있다. 경극학교인 이원만 들어도 경극 공연장이다. 현대식 극장으로 800명을 수용한다. 공연도 화려하고 대중성이 강하다. 호광회관에 비해 무대도 넓고 출연하는 배우도 많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분장하고 의상을 입는 모습도 선보인다.
화단이 여성스러운 배역이라면 삼차구(三?口)는 남자 무사가 배역인 무생(武生)이다. 세 갈래 길이라는 제목은 북송 시대 요나라에 항거한 양가장연의(?家?演?) 소설이 출처다. 몸을 드러내지 않고 장군을 암중 보호하는 주인공이 삼차구에 있는 여관에 묵는다. 주인의 오해로 야밤에 불 꺼진 방에서 둘이 싸운다. 책상 하나를 놓고 암흑 속에서 서로 피하고 찾는 과정이 다소 코믹하다. 하늘로 붕붕 날아다니고 전투도 격렬하다. 주인공은 흰색, 주인은 검은 옷을 입고 등장한다.
다음은 긴 천을 휘날리며 등장하는 천녀산화(天女散花)다. 일찍이 매란방이 연출하고 연기해 유명하다. 출처는 불경이다. 석가여래가 동쪽에서 상서로운 구름이 날아오자 재가 신자인 유마힐(?摩?)이 병환이 생겼다고 생각한다. 문수보살과 제자들을 보내 안부를 묻는다. 다시 천녀도 보내 유마힐과 제자들을 시험한다. 천녀는 꽃을 뿌려 석가여래의 가르침을 알린다는 내용이다. 노래하며 춤을 추고 천이 이리저리 포물선을 그린다. 난해한 뜻과 동작 때문에 마치 경전을 읽은 듯 어렵고 길다. 부드러운 감성으로 인내하면 나름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다.
뭐니 뭐니 해도 삼국지가 최고다. 경극 레퍼토리만 거의 100개에 이른다. 무궁무진한 출처다. 전마초(??超)는 장비와 마초의 전투다. 장로의 부하 장수인 마초가 유비가 주둔한 가맹관을 공격하자 장비가 출관해 맞서 싸운다.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본진으로 돌아간다. 부하들도 격전을 치른다. 옷을 갈아입고 다시 나타난 두 장수는 또 싸운다. 밤까지 전투가 이어졌으나 승부를 가리지 못한다. 성곽에서 지켜보던 유비는 마초의 무예에 감탄하고 마초도 마음속으로 귀순을 생각한다는 내용이다. 악기 반주에 맞춘 동작은 선이 굵다. 서로 엇갈리며 싸우다가 순간 멈추기도 한다. 한 박자 쉰다. 박수갈채가 요란하다.
공연장 옆에서 경극 공예품을 판다. 분장이 곱고 장식이 화려한 매란방 인형이 있다. 뺨에 살짝 댄 손은 매란방 스타일의 품격이다. 남자가 여자 배역을 연기하는 경극 배우는 이제 사라졌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청의는 대명사처럼 오래 남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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