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렁탕 그릇을 목판에 담아서 어깨에 메고 자전거를 달리던 사람이 다른 자전거와 충돌하여 둘이 다 나가넘어져 설렁탕 그릇을 깨트리고는 끝이 없이 네가 잘못이거니 내가 잘못이거니(후략)”
(이광수 '흙' 1932)
배달 문화라는 말이 있다. 배달이 ‘문화’가 되기 어려운 건 이미 저 시절에도 그랬던 모양이다. 문화는 현상을 넘어서야 그리 부를 수 있다. 배달은 과거에 흥미로운 삶의 절편에 속했다. 가서 먹어도 될 일을 일부러 배달해서 먹기도 했다. 배달을 기다리는 기대감, 음식의 구수한 냄새, 집이나 사무실이라는 공간이 잠시 전문점의 분위기로 바뀌는 순간들 같은. 불행히도 그런 아스라한 추억과 달리 코로나 시국에 배달이 늘면서 온갖 고통스러운 일상이 우리에게 왔다. 배달 노동자들의 위험한 질주, 거대 플랫폼의 횡포, 그 플랫폼끼리 벌이는 난투(이광수 시절에는 배달부끼리나 싸우고 말았을)까지.
무얼 팔고 얼마 챙겨서 먹고사는 일을 이문 남긴다고 한다. 배달일도, 택배일도 그렇다. 개당 단가가 어떻고 이익이 어떤가 따진다. 그걸 받아먹는 우리도 셈을 한다. 시켜 먹으면 비싸다거나 되레 간편하니 더 싸다는 산수를 하게 된다. 심지어 포인트가 얼마나 쌓이고, 내가 시킨 음식만 곧바로 가져다주는 서비스에 환호하기도 한다. 배달원은 엘리베이터를 타지 말라거나 타게 되면 비용을 분담하라는 아파트가 있다는 기사를 보고 경악하기도 한다(누구는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 사이에서 누군가 죽고 다치고 그것이 언론에 크게 보도나 되어야 우리 삶을 한번 보게 된다. 택배를 좀 줄여야 되지 않을까, 아니야 그래도 이걸 시켜야 그들도 먹고살지, 하루에 당최 400개, 500개나 되는 물건을 택배할 수 있다는 게 사실이야(최근 숨진 한 택배노동자의 마지막 문자는 그렇다고 적고 있다).
모르긴 몰라도 이광수 시절에 배달부끼리 부딪혀 뚝배기값을 물어냈을망정 죽고사는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 배달은 아침에 헬멧을 쓰거나 트럭에 시동을 걸 때 목숨을 거는 일이 되고 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리뷰를 보고 음식과 택배 물건을 시키고, 늦지 않기를 바라며, 어떨 때는 늦은 배달에 격분하기도 한다. 반면에 핸들을 쥔 이들은, 신호가 팡팡 뚫려서 고객님의 불만을 사지 않기를, 다른 차나 오토바이와 부딪치지 않기를, 부디 오늘 할당량을 다 배달할 수 있기를 빈다(밤 11시에 오는 배달은 그런 과정의 결과다). 제발 무거운 곡물자루나 생수박스가 걸리지 않기를, 그것을 배달하는 목적지가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이 아니길 비는 마음따위는 우리는 모르거나 안다고 해도 달리 방법이 없겠다고 체념한다.
모든 일은 시장에 맡기라는 말은 어떤 면에서 방관이고 책임 회피다. 많은 노동현장에서 위험을 외주화하지 말라고 외친다. 어떤 면에서는 배달도 우리가 위험을 외주시킨 일일 수도 있다. 코로나라는 특수 환경이 그것을 가속화시켰다. 코로나로 일이 늘어난다고, 위험까지 늘어나는 일이 옳은 것일까. 대체로 세상의 관심은 큰 사고가 벌어져야 생긴다. 매일처럼 벌어지는 그 현장을 우리는, 관계당국은, 의회는 정말 몰랐던 것일까. 알고도 방관한 것이 아니란 말인가. 내가 시킨 밥이, 생필품 몇 가지가 안전하게 오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 이토록 힘든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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