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포함한 한반도 주변 주요국들의 외교 우선 순위에서 한국 정부가 밀려나고 있는 정황이 속속 포착되고 있다. 미국과 중국으로부터 줄세우기 압박을 받는 것도 모자라 홀대까지 당하고 일본의 냉랭한 태도도 여전하다.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흔들리면서 곳곳에서 파열음이 터져나와 한반도 외교가 진공 상태에 빠졌다는 애기가 나온다.
14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제52차 한미안보협의회의(SCM)에서 거의 모든 이슈에서 한미 간 현격한 입장차가 여실히 드러났다. 마크 에스퍼 장관은 현 정부 임기 내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등 한국의 요구사항은 거부하고 방위비 분담금 인상과 무기 구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등 미국 이익에 부합하는 목표를 전면에 내세웠다. 미 대선 결과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트럼프 정부가 그간 누적돼왔던 불만을 한꺼번에 폭발시키며 한국에 대한 청구서를 무더기로 들이민 모양새다. 특히 SCM에서 관례적으로 열린 양국 국방부 장관의 공동기자회견도 미국의 거부로 취소돼 홀대 논란도 피하기 어렵게 됐다. 미국 측은 "대선을 앞둔 민감한 시기"라는 이유를 든 것으로 알려졌지만, 동맹국 장관에 대한 외교적 결례라는 게 안팎의 평가다.
앞서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부 장관이 이달초 방한을 연기한 데서도 한국에 대한 트럼프 정부의 냉랭한 분위기가 감지됐다. 일본과 한국을 순방할 예정이었던 폼페이오 장관은 트럼프 대통령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감염이 확인되면서 일본만 방문했다. 서훈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13~16일 워싱턴을 방문한 것은 한미 간 기류가 심상치 않다는 내부 판단 때문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동맹관계인 한미 간 이견이 이 정도로 표면화된 것은 드문 일"이라고 우려했다. 한미간 균열이 동맹 관계를 비용으로 계산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지만, 우리 정부 역시 전례 없는 도전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강준영 한국외대 국제지역연구센터장은 "물밑 소통을 통해 동맹인 미국과 신뢰를 유지해야 하는데 정부 안팎에선 '미국 때문에 일이 안된다' 인식이 강했다"고 말했다.
미중 갈등 국면에서 정부가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미국의 불신을 초래한 요인으로 꼽힌다. 정부는 미중 사이에서 국익을 최대화하겠다는 입장이지만 몸값을 높이기는 커녕 되레 양측으로부터 홀대를 받는 결과만 낳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 폼페이오 장관의 방한이 연기되자 이를 견제하려던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이 돌연 방한을 미뤄 양쪽으로부터 무시를 당했다는 뒷말이 적지 않았다. 외교가에선 "중국이 한국 정도는 언제든 방문할 수 있는 나라라고 여긴 듯"하다는 평가도 나왔다. 앞서 8월 양제츠(???) 공산당 외교담당 정치국 위원이 한국을 찾긴 했으나 한국 정부의 요구 사항인 한한령(限韓令) 해제 등은 심도있게 다뤄지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이 아쉽지 않기는 일본도 비슷한 분위기다. 일본은 강제징용 판결에 따른 일본 기업의 한국 내 자산 현금화 작업을 중단하지 않으면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총리가 방한할 수 없다는 입장을 최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연말 한중일 정상회담 서울 개최로 고립감을 탈피하겠다는 정부 계획에도 차질을 빚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국책 연구기관의 전문가는 "일본이나 중국과의 외교적 긴장감이 올라갔을 때 버틸 수 있게 하는 외교적 근간이 한미관계였는데, 동맹관계가 느슨해지면서 외교적 고립감이 더해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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