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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가호가 모든 동물들에게

입력
2020.10.24 11:00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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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휴일이 많은 9월과 10월의 달력을 펴는 건 즐겁다. 아쉽게도 한글날을 끝으로 다음 공휴일은 12월까지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11월 달력을 넘길 때는 한숨을 한번 쉰다. 그런데, 아마도 달력에 표시되어 있지도 않고, 잘 알려져 있지도 않지만 동물을 생각하고 기념하는 많은 하루들이 존재한다. 10월에는 너구리(10월 1일)와 나무늘보(10월 20일)의 날이 있고, 10월 2일은 세계 농장동물의 날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10월 4일은 세계 동물의 날이다.

본인이 작가이면서 잡지 '인간과 개'의 발행인이기도 했던 하인리히 짐머만(Heinlich Zimmerman)은 1925년 3월 24일 베를린에서 ‘동물의 날’ 행사를 개최한다. 5,000여명이 모인 꽤 큰 행사였다. 1929년부터 10월 4일로 옮겨진 이 행사는 처음에는 독일어권 나라를 중심으로 개최됐다. 그러다 2년 뒤 짐머만이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세계 동물보호단체들이 모인 행사에 참여해 세계동물의 날 지정을 제안했고, 이 제안이 만장일치로 받아들여지면서 드디어 동물의 날은 세계적인 행사가 됐다. 장소 사용이 여의치 않아 1925년의 행사는 3월에 열렸지만, 짐머만은 원래 세계 동물의 날을 10월 4일로 지정하려고 했다. 10월 4일은 아시시(Assisi)의 성인 프란체스코(St. Francesco) 축일이기 때문이다.

난폭한 늑대를 달랜 아시시의 성인

종교를 주제로 한 회화나 판화에서 늑대와 함께 있거나 새에게 말을 하고 있는 탁발 수도자를 본다면 그가 바로 아시시의 성인 성 프란체스코이다.

새에게 설교하는 성 프란체스코 (Giotto, 1297 - 1299). 위키피디아 캡처

새에게 설교하는 성 프란체스코 (Giotto, 1297 - 1299). 위키피디아 캡처

그는 12세기 이탈리아의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세속적 삶을 버리고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설립해 종교적인 삶을 살았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돌보고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마음을 움직이는 설교를 했다. 그는 신의 모든 창조물을 사랑하고 존중했다. 그래서 동물을 그다지 살뜰히 배려하지 않았던 중세 크리스트교 환경에서도 동물과 관련된 따뜻한 일화들을 남겼다.

가장 유명한 것은 구비오의 늑대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가 구비오에서 설교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악명 높은 늑대 한 마리가 가축을 공격하고 급기야는 사람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모두가 늑대를 두려워했고 늑대가 나타나면 성문을 걸어 잠갔다. 프란체스코 성인은 성을 나가 직접 달려드는 늑대에게 다가가 신의 이름으로 공격을 멈출 것을 명령했다. 이에 늑대는 순한 개처럼 발 밑에 엎드려 성인이 머리에 손을 얹게 해주었다. 성인은 늑대를 형제로 칭하고 늑대가 굶주리지 않도록 먹을 것을 제공한다고 약속하며 성의 사람과 가축을 공격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그러자 늑대는 성인이 내민 손에 발을 얹어 사람들을 해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성 프란체스코는 늑대를 데리고 성 안으로 들어가 놀란 사람들 앞에서 늑대를 발아래 두고 설교했다. 사람들은 늑대와의 약속을 지켰고 늑대는 2년간 성 안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다 죽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늑대의 죽음을 애도하며 매장하고 그 장소에 성 프란체스코 성당을 세웠다. 1872년에 이 성당의 교회당 아래서 늑대의 뼈가 실제 발굴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가 가는 길에 새들이 내려앉아 설교를 듣고 물고기도 설교를 들었다는 설화도 유명하다.

동물을 형제로 여기며 인간과 같은 신의 피조물로서 존중하는 마음, 인간에게 하듯 동물의 사정을 살피고, 동물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믿음을 전하는 소박한 마음은 오랫동안 칭송 받았다. 그래서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는 동물과 환경을 수호하는 성인으로 추앙 받는다. 성 프란체스코의 축일인 10월 4일은 그래서 세계 동물의 날로 의미를 더하게 되었다. 그가 남긴 동물에 대한 말들을 이제 크리스트교 교인들뿐 아니라 동물을 아끼는 모든 사람들이 나눈다.

“우리의 작은 형제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첫 번째 의무이지만, 그걸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이들이 우리를 필요로 할 때 언제든 이들을 돌봐야 한다는 더 높은 사명이 있습니다."

구비오의 늑대 (Stefano di Giovanni, 1437 ?1444). 위키피디아 캡처

구비오의 늑대 (Stefano di Giovanni, 1437 ?1444). 위키피디아 캡처


동물을 위한 기도와 감사

동물을 수호하는 성인이 성 프란체스코뿐만은 아니다. 성 모데스토(St. Modestus)는 3세기 그리스 정교회 주교였다. 그 역시 동물의 수호자이며 아픈 동물을 돌보는 성인으로 유명하다. 특히 그의 ‘동물을 위한 기도’는 아프고 위험에 빠진 동물에 대한 신의 보호를 청하고 있다.

“... 만물의 주인이시며 창조주이신 주님께 기도합니다. 모든 생명의 기원이신 당신께 간청합니다. 이 간청에 귀를 기울여, .... 소와 말, 당나귀, 양, 염소, 벌, 그리고 모든 다른 동물들의 질병과 위험을 가져가 주시옵소서. ... 주 예수 그리스도여, 죽음의 운명에 괴로움 당하고 고통 받는 동물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고통에 찬 의미 없는 소리로 울부짖는 것 외에는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이들을 위해 자비를 베풀어 고통을 덜어주소서..."

한편 성 로코(St. Rocco)에게도 특별한 동물 일화가 있다. 그는 흑사병이 퍼진 13세기 로마를 순례 하면서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다가 결국 병에 걸려 죽음에 이르렀다. 마을에서 쫓겨나 숲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그에게 개 한 마리가 나타났다. 개는 매일 빵을 입에 물고와 이 성인을 먹이고 그의 허벅지에 난 상처를 핥아 주었다. 결국 그는 병에서 회복되었고, 개의 주인이었던 귀족이 개를 따라와 성인을 발견하고는 그의 추종자가 되었다. 빵을 입에 문 개와 함께 허벅지에 상처가 있는 성인의 동상이나 그림이 있다면 그건 성 로코를 주제로 한 것이다. 그리고 성 로코의 축일인 8월 16일에는 장애인이나 환자를 돕는 개들에 대한 감사의 의미에서 축성이 이루어진다.

성 로코 (Francesco Ribalta, 1625). 위키피디아 캡처

성 로코 (Francesco Ribalta, 1625). 위키피디아 캡처


동물과 함께 천상에 이르다

동물을 아끼고 지킨 성인이 크리스트교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힌두교의 마하바라따 신화는 유디슈티라라는 왕의 이야기를 전한다. 영원한 진리이자 가르침에 따르는 삶을 마친 그는 천상을 가는 길에 올랐다. 이 여정에서 개 한 마리가 끝까지 그와 함께 했다. 여정이 마지막 천상의 문 앞에 이르자 그의 앞에 나타난 인드라 신이 천상에 들어가려면 함께 온 개를 버려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유디슈티라는 모든 생물을 신성하며 자신에게 의존하는 존재를 버리는 것이 다르마가 아니기 때문에 결국 천상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더라도 개를 버리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유디슈티라에게 있어 이 요구는 천상의 마지막 관문이었고 개는 신으로 변해 그가 천상으로 들어가도록 인도했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도 신의가 존재하고 이것이 신의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하루쯤은 동물을 위해서

동물은 고대 종교에서 신을 상징하거나 신 그 자체로 의미를 가졌다. 신을 상징하는 동물에 해를 가할 경우 신을 모독한 것과 같이 벌이 가해지기도 했다. 동물의 삶이 신의 섭리를 담고 있기 때문에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준다. 인간보다는 미천하지만 신의 피조물로서 동물은 신이 창조한 세계의 일원이다. 그러나 정작 종교가 구원하거나 보살펴야 하는 존재의 대상에서 동물은 빠지기가 쉽다. 그래서 사람에게 해를 가한 동물을 보살피고, 동물의 질병과 고통을 위해 기도하고, 약속된 천상보다 함께 지냈던 동물과의 신의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종교적 인물이 더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물론 이들의 선행은 종교가 가진 틀에 머무르고, 동물은 우월한 인간에게 이용되는 것이 순리에 맞고, 동물에 대한 보호 역시 인간이 동물을 보다 잘 이용하기 위한 수단일 뿐 동물 그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비판도 무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믿음체계 안에서 신의 뜻과 가르침이 동물에게도 미친다고 믿고 실천했다. 그리고 그런 성인을 기리고 현재의 상황을 바꾸기 위한 계기로 삼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그래서 동물을 위한 하루, 그 많은 동물의 날들이 새삼스러우면서도 반갑다. 신앙이 있든 없든, 그 종류가 무엇이든, 신심이 깊든, 그렇지 못하든 상관없이 하루쯤은 일상에서 잊고 있었던 동물의 삶과 고통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천명선 서울대 수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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