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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배우, 첼리스트, 종군기자 ... 직업의 귀천은 어떻게 생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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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배우, 첼리스트, 종군기자 ... 직업의 귀천은 어떻게 생기나

입력
2020.10.16 04:3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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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솔 장편소설 '부다페스트 이야기'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지난 12월 발표된 교육부의 직업 선호도 조사에 따르면 초등학생들은 운동교사, 교사, 크리에이터(순서대로 1~3위)를 희망직업으로 꼽았다. 중학생들은 교사, 의사, 경찰관을, 고등학생들은 교사, 경찰관, 간호사 순이다. 교사는 13년째 중ㆍ고등학생의 희망직업 1위로 꼽혔고 크리에이트, 뷰티 디자이너, 마케팅ㆍ홍보 전문가등이 희망직업 10위 내에 새롭게 이름을 올렸다.

명예, 소득수준, 사회에 기여하는 정도 등 저마다의 가치판단을 기준으로 아이들은 어떤 직업을 자신의 ‘장래희망’ 칸에 기입할지를 선택한다. 아이들이 꿈꾸는 직업은 곧 그 직업을 가진 어른의 일이 가치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른들은 자신이 현재 갖고 있는 직업에 대한 자긍심을 아이들의 ‘장래희망’을 통해 확인 받는다.

김솔의 새 장편소설 ‘부다페스트 이야기’는 바로 직업을 둘러싼 어른들의 욕망을, 아이들이라는 거울로 비춰본 소설이다. 2012년 한국일보로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후 4개의 장편소설과 3개의 소설집을 내며 자신만의 이야기 세계를 확실히 구축한 작가가 이번에는 ‘직업’을 소재로 자신의 입담을 거침없이 풀어냈다.


'부다페스트 이야기'. 김솔 지음. 민음사 발행. 1만4,000원. 356쪽

'부다페스트 이야기'. 김솔 지음. 민음사 발행. 1만4,000원. 356쪽


소설의 배경은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위치한 세인트버나드 국제학교다. 세계 각지의 우수한 학생들이 모여드는 이 국제 학교에서는 매년 9월 마지막 주 수요일마다 ‘인터내셔널 데이’라는 행사를 연다. 이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한 직업을 대표할 만한 성취를 이룬 사회 각층의 주요 인사들을 일일교사로 초청하는 직업 체험 수업이다. 일일교사로 초청받는다는 것은 곧 아이들에게 귀감이 될만한 어른이 되었다는 뜻이자, 초청받은 이력을 발판으로 자신의 성공을 더 확실하게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때문에 자신이 ‘자격 있다’ 생각하는 어른들은 일일교사로 초청받기 위해 로비도 서슴지 않고 초청받지 못했을 경우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기도 한다.

까다로운 사전심사와 교육을 통과해 일일교사로 초청된 직업은 총 열 다섯 개다. 군인, 요리사, 의사, 엔지니어, 여행가, 패션 디자이너, 공무원, 건축가, 영화배우, 첼리스트, 종군기자, 축구 감독, 보험 판매원, 변호사, 부자. 여기에 공식적으로는 초대받지 못한 목사, 외교관, 통역사, 사업가, 농부, 시인, 회사 법인장 그리고 이 학교의 교사까지. 소설은 총 23개의 직업군에 속한 인물들이 자신의 직업에 대해 설명하는 일종의 직업소개서다.

그러나 소설은 단순히 다양한 직업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어른들의 직업인으로서의 허영과 위선을 고발하기 위해 소설은 ‘편집자’라는 존재를 끼워 넣는다. 학교에서는 매년 이 직업 체험 수업의 강의 내용을 채록하고 이것을 주요 관공서에 배포해 왔는데, 언젠가부터 이 강의록에 편집자의 주석이 추가된 버전이 서점에서 책으로 판매되기 시작한다. 김솔의 소설 ‘부다페스트 이야기’는 곧 세인트버나드 국제학교 직업 체험 강의록의 편집자 주석 버전이며, 때문에 소설의 화자는 당연히 정체가 알려지지 않은 이 편집자가 된다.


김솔 작가의 본업은 대기업 굴착기 엔지니어다. 평일 새벽 3시에 일어나 6시 30분 집을 나설 때까지 글을 쓰고 낮에는 직장생활을 하는 '직업인'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김솔 작가의 본업은 대기업 굴착기 엔지니어다. 평일 새벽 3시에 일어나 6시 30분 집을 나설 때까지 글을 쓰고 낮에는 직장생활을 하는 '직업인'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편집자는 자신의 직업적 성취와 그 직업의 위대함, 그리고 사명감을 늘어놓은 일일교사들이 직접 말하지 않은 그들의 비밀을 폭로하며 과연 그들이 아이들의 ‘귀감’이 될만한 이들인지 묻는다. 각기 다른 직업의 이들을 판단하는 중요한 윤리적 기준이 되는 것은 다름 아닌 부다페스트 외곽에 집단 거주하는 ‘로마니(집시)’다. 석유 엔지니어의 지식과 기술은 헝가리의 군인들이 로마니 시위대를 진압하는 데 적극 활용됐고 변호사는 로마니 거주지에 화학 폐기물을 무단으로 매립한 화장품 업체를 변호했다.

편집자는 “직업이란 사회와 역사에 개인이 강제적으로 동원되는 방식”이라 믿기에 로마니와 관련된 일일교사들의 이야기를 통해 헝가리의 현실과 미래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작가는 결국 직업의 귀천은 '외곽의 존재들'을 향한 자신의 윤리적 소임과 이해를 기준으로 판별되어야 한다고 말하고자 했는지 모른다.

작가의 본업이 대기업 굴착기 엔지니어임을 감안하고 오늘날 한국의 수많은 ‘로마니’들이 떠올려본다면, ‘부다페스트 이야기’를 ‘한국 이야기’로, ‘편집자’를 ‘김솔’로 바꿔 읽지 않을 도리는 없다.

한소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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