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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심에 눈먼 공권력 범죄

입력
2020.10.19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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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 북아일랜드 분쟁과 '길포드 4'

테러 누명을 쓰고 수감됐다가 15년 만인 1989년 풀려난 '북아일랜드 분쟁'의 피해자 '길포드 포'. thejusticegap.com

테러 누명을 쓰고 수감됐다가 15년 만인 1989년 풀려난 '북아일랜드 분쟁'의 피해자 '길포드 포'. thejusticegap.com


영국 북아일랜드 분쟁은 1960년대 말 시작돼 1998년 벨파스트 협정으로 진정됐다. 저 분쟁의 쌍방이 아일랜드 민족주의자 군사조직 아일랜드 공화국군(IRA)과 영국군 및 지역 경찰대다. 하지만 극렬 테러는 주로 IRA의 급진분파인 'PIRA(IRA임시파)'가 주도했다.

본격 테러의 신호탄이라 할 만한 사건이 1974년 10월 5일 밤 잉글랜드 서리 주 길퍼드(Guildford)에서 일어났다. 술집 '호스 앤 그룸(Horce and Groom)'에서 터진 폭탄은 영국군 여군 2명 등 군인 네 명과 22세 노동자 한 명의 목숨을 앗았다. 약 30분 뒤 인근 'The Seven Stars'에서 두 번째 폭탄이 터졌지만, 1차 테러에 놀란 군인과 시민들이 대부분 자리를 떠 사망자는 없었다. 사망자 외에 모두 65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한달 뒤 영국은 '테러방지법' 을 제정, 48시간 임의구금 한도를 테러 용의자에 한해 7일로 연장했다. 고문 시간이 그만큼 늘어났다는 의미였다.

절도 등 자잘한 범죄를 일삼던 17~25세 청년 4명(여성 1명)이 용의자로 체포됐다. 그들은 구타와 고문 끝에 범행을 '자백'했고, 75년 10월 19일 살인 등 혐의로 전원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피의자 중 한 명이 사건 당시 런던에 머물렀다는 명백한 알리바이조차 무시됐다. 며칠 뒤 폭발물 운반 등 혐의로 맥과이어 일가 등 친지 7명도 체포돼 76년 3월 4~14년 형을 선고받았다. 52세의 패트릭 콘론은 4년 뒤 감옥에서 별세했다. 다른 테러로 체포된 PIRA 일당이 77년 길퍼드 테러를 자기들 짓이라고 자백했지만, 경찰과 사법 당국은 그 자백을 묵살했다.

1989년 두 사설탐정이 조사 끝에 길퍼드 테러 수사팀의 증거-자백 조작 사실을 밝혀냈다. 각각 '길퍼드 포(Four)'와 '맥과이어 세븐(seven)'이라 불린 그들은 15~16년 옥살이 끝에 89년 10월과 90년 7월 재심으로 풀려났고, 2005년 토니 블레어 수상이 공식 사죄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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