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손에 쥐고 미 대선 이후를 겨냥한 몸값 높이기에 나섰다. 당 창건 75주년 기념 연설에서 핵 무력이나 미국을 직접 겨냥하는 도발적인 메시지는 삼가긴 했으나, 새 전략 무기를 대거 선보여 미국을 위협하는 존재감도 한껏 과시했다. 일단 11월 미국 대선 결과를 지켜본 뒤 판을 뒤흔들거나 새로운 협상 판을 만들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김 위원장은 남측을 향해서도 대화 재개 여지를 열어놓았다. 미국과의 협상이 여의치 않으면 남북 관계를 돌파구로 삼으려는 포석이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신형 전략무기 줄줄이 공개...존재감 과시
김 위원장은 10일 오전 0시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노동당 창건 75주년 기념 열병식 연설에서 3중고(대북제재ㆍ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ㆍ수해)로 최악의 경제난을 겪고 있는 주민들에게 무한 감사를 표시하면서 대외적으로는 자위적 전쟁 억제력을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재차 강조했다. '전쟁억제력'이란 표현을 쓰긴 했으나 미국의 대북정책이 변화하지 않으면 핵무기를 위시해 전략 무기를 지속해서 강화해나간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실제 열병식에선 전세계가 주목할만한 새 전략무기들이 줄줄이 등장했다. 미국 본토를 동시 타격할 수 있도록 사거리를 확장하고 다탄두를 탑재한 신형 ICBM과 신형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인 '북극성-4형'이 공개됐다. 북한판 이스칸데르와 초대형 방사포 등 최첨단 군사장비들도 대거 선보였다. 지난해 연말 7기5차 전원회의에서 '새로운 전략 무기를 보게 될 것"이라고 했던 김 위원장의 예고를 실현한 셈이다.
북한이 미국 대선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시점에 새 전략 무기를 대거 공개한 것은 미국을 겨냥한 메시지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재집권하든,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가 당선되든 미국이 대북 제재와 군사적 압박을 지속하는 한 타협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다. 신형 ICBMㆍSLBM을 공개한 것도 미국 대선 이후 대북정책 판도에 따라 도발 수위를 결정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대미 메시지 수위 조절했지만, 대선 이후 격랑 예고
다만 김 위원장의 연설 메시지는 수위를 조절한 흔적이 뚜렷했다. 미국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 핵무력이라는 단어도 아예 쓰지 않았다. 김 위원장은 "우리의 군사력이 그 누구를 겨냥하게 되는 것을 절대로 원치 않는다"며 전략 무기가 '자위적 방어 수단'이라는 점도 거듭 강조했다. 차기 백악관 주인을 점치기 어려운 상황에서 굳이 무리수를 두지는 않은 셈이다.
김 위원장의 수위조절에도 불구하고 미국 대선 이후의 북미관계는 격랑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는 관측이 많다. 미 본토를 겨냥하는 신형 ICBM을 공개한 것만으로도 미국 내 대북 여론이 악화할 수 있다. 미 행정부 고위 관계자는 10일(현지시간) "북한이 자국민의 밝은 미래를 위해 힘쓰는 것보다 금지된 핵, 탄도 미사일 프로그램을 계속해서 우선시하는 것에 실망했다"고 밝혔다고 로이터통신이 전했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미국은 북한이 얘기하는 자위적 억제력보다는 선제적 공격 능력 의도에 초점을 맞출 것이 분명하다"며 "향후 북미간 협상이든 대결이든 이전보다 더 치열하게 전개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예측했다.
"사랑하는 남녘 동포에게"...남북관계는 보험용?
김 위원장의 대남 메시지는 짧지만 굵었다. 김 위원장은 코로나19로 인한 세계 보건위기를 우려하는 대목에서 "사랑하는 남녘의 동포들에게도 따뜻한 이 마음을 정히 보낸다"며 "하루 빨리 이 보건위기가 극복되고 북과 남이 다시 두손을 마주 잡는 날이 찾아오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 이후 남측 정부를 외면해온 김 위원장이 공개적으로 긍정적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최용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안보전략연구실장은 "남북관계가 아예 문이 닫힌 건 김 위원장이 2019년 10월 금강산 관광시설 철거를 지시한 이후"라며 "김 위원장 스스로 문을 다시 열 뜻을 밝힌 것은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다만 코로나19 극복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어 남북관계 복원이 김 위원장의 '1순위 과제'는 아니다. 김 위원장이 9월 문재인 대통령과 코로나19 위로 친서를 주고 받고 서해 공무원 피격 사과 통지문을 보낸 것처럼 남북관계를 파탄 상황까지 몰고 가지는 않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3중고에 따른 위기 상황에다 대미 관계도 불투명해 남북 관계를 보험용으로 관리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다.
1월 8차 당대회에서 노선 정할 듯...선남후미 가능성도
김 위원장은 이번 연설에서 내년 1월 초에 열리는 8차 당대회를 대내외 전략의 '터닝포인트'로 삼겠다는 점을 공식화했다. 김 위원장은 "혹독한 고난 속에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하고 있다"며 "8차 당대회에서 실현을 위한 방략과 구체적 목표를 제시해 인민의 행복을 마련하는 새로운 단계로 가겠다"고 밝혔다. 미국 대선 이후 북미 협상의 새 판 짜기는 물론 대내 경제발전 계획도 새로 수립한다는 뜻이다.
미 대선 결과에 따라 북한이 기존 선미후남(先美後南)에서 선남후미(先南後美)로 방향을 틀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미국의 새 행정부가 들어서면 대북 정책이 수립될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고 아예 후순위로 밀릴 수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재집권해도 북미 관계를 이전처럼 우선 순위에 두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3중고 위기를 겪는 북한이 미국을 자극하는 도발에 나설 수 있는 배경이다. 이 때문에 대미 관계가 불안정할 경우 북한이 '우리 민족끼리'를 강조하며 남쪽에는 유화 공세를 펼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미국 정권 교체기에 북한 문제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질 수밖에 없어, 북한이 과도기적 상황에서는 남쪽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할 가능성도 있다"고 봤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