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이용재 음식평론가가 토요일 격주로 식재료에 대한 다채로운 이야기를 풀어 놓습니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실은 아무도 몰랐던, 식재료를 제대로 대하는 법을 통해 음식의 기본을 이야기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본격적으로 확산되고 난 다음인 3월, 인터넷에 한 남자의 사연이 돌았다. 감염 대비를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자가격리에 들어간다는 내용이었다. 재산 전액을 인출하는 한편, 쌀 200㎏과 돼지고기 200근을 비롯한 식품도 대량 구매했다고 한다. 그의 사연을 접하니 바로 비상식량 생각이 났다. 우리는 대체로 차분하게 대응해 넘겼지만 코로나 확산 초기, 세계 곳곳에서 식료품과 생필품의 ‘패닉 바잉’이 일어났다. 당장의 사재기와 함께 벌어지는 난장판도 문제지만 한편 미래도 궁금했다. 난장판을 뚫고 쟁인 물건들이 정말 비상 시국에 쓸모가 있을지 다들 생각해 보았을까?
그때부터 본 칼럼을 통해 비상식량을 챙기는 요령을 살펴보고 싶었다. 하지만 한참 동안 때만 고르고 있었다. 시기를 자칫 잘못 골랐다가는 불안감만 부추길 수 있기 때문이다. 불안을 완전히 떨칠 수 없지만 시야가 한결 또렷해지기는 했다. 백신은 적어도 1년 내로는 상용화가 되기 어렵고, 우리는 마스크 착용과 사회적 거리 두기가 핵심인 ‘뉴 노멀’의 삶에 꽤 적응했다. 적어도 몇 개월 전 보다는 비상식량이라는 개념을 차분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인 가운데 본 칼럼이 90화를 맞이했다. 이래저래 특집으로 비상식량을 준비 및 운영하는 요령을 살펴보자.
신선식품 대신 장기보관 가능해야
7개월이 지난 지금, 자가격리에 들어간 남성이 챙긴 돼지고기의 안부가 궁금하다. 과연 그는 고기를 얼마만큼이나 먹었을까? 하루 세 끼 330g씩 꾸준히 먹었다면 이미 냉동실을 비웠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돌발상황이 발생해 전기 공급이 끊어졌다고 가정해 보자. 냉동고가 제 기능을 못하니 고기는 길게 잡아 사흘을 못 버티고 상할 것이다.
비상식량이 필요한 상황의 기준이 각자 다를 수도 있지만 준비한다면 최악의 시나리오에 맞춰야 한다. 무엇이 원인이든 사회 간접 자본이 일정 기간 혹은 영구적으로 기능을 못하는 상황 말이다. 수도와 전기, 가스 공급의 중단부터 석유의 고갈이 핵심이다. 벌어져서는 절대 안되겠지만,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지 못해 의료 시스템 붕괴라도 일어난다면 최악의 상황도 일어날 수는 있다. 무엇이 원인이든 그런 시나리오에서는 우리가 큰 자각 없이 누렸던 식생활 전체가 의미를 잃을 수 있다.
일단 제대로 보관하거나 조리할 수 없어지므로 거의 모든 신선식품이 쓸모 없어진다. 비상식량의 계획에서 신선식품이 원칙적으로 배제되는 가장 큰 이유이다. 포장만 뜯어 먹을 수 있는 가운데 쉽고도 오랫동안 저장할 수 있어야 비상식량의 자격을 갖춘다. 한편 식사의 의미 또한 정황에 맞춰 다시 정의 내려야 한다. 자유롭고 원활한 식재료의 저장 및 조리가 불가능해진다면 식사 또한 맛에 큰 비중을 둘 수 없어진다.
더군다나 사회 간접 자본 및 자원이 기능을 못하거나 고갈된다면 식량 자원 또한 차츰 고갈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런 상황을 한데 아우르면 식사는 ‘음식’을 통해 맛과 즐거움을 찾는 의식과 절차에서 ‘식량’을 섭취하는 생존 수단으로 전환될 것이다.
카레, 라면은 부적합...간편한 고열량식이 제격
재정의된 식사의 의미에 걸맞은 식량은 다음의 조건을 갖춰야 한다. 첫째, 열량이 높아야 한다. 먹은 뒤 일시적으로 몸이 무거워지는 등, 비상 시국에는 식사 행위 자체가 부담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최대한 적게 먹고도 많은 열량을 얻을 수 있는, 효율 높은 음식이 바람직하다. 정착이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부피와 무게가 적고 열량이 높은 음식이 휴대에 간편해 부담이 적다.
둘째, 먹고 치우기가 편해야 한다. 언제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 모르는 시국이라면 최대한 빨리 먹고 치운 뒤 경계 태세를 가다듬어야 한다. 따라서 가열을 거치지 않거나 숟가락 같은 별도의 도구가 필요 없을 수록 바람직하다. 국내에서 비상식량이라 흔히 여기는 카레 등 레토르트 요리와 즉석밥의 조합이 적합하지 않은 이유이다. 한국인의 소울푸드인 라면도 안타깝지만 마찬가지이다. 제대로 먹으려면 끓여야 하는데다가, 그냥 먹기에 생면은 맛도 단조롭고 목도 멘다.
비상식량 비축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처음부터 멀고 힘들게 나갈 필요가 없다. 일단 72시간, 즉 사흘치부터 완결성을 갖춰 비축해 경험을 쌓은 뒤 이주일, 한달 식으로 기간을 조금씩 늘려나간다.
생존이 주 목적이므로 비상식량 비축의 기준 또한 간단하게 일일 표준 열량이다. 성인은 2,000, 영아 (만 1~2세)는 1,000, 유아 (만 3~5세)는 1,400 칼로리이다. 비상식량이므로 일일 표준 열량을 꽉꽉 채워 준비한다는 게 모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일단 준비해 놓으면 분량을 조절해 더 오랜 기간 먹을 수도 있으니 기준을 낮추지는 말자. 참고로 표준 열량의 절반만 먹고도 인간은 장기간 생존할 수 있다.
물, 견과류, 통조림, 초콜릿...비상식량 우수 후보
이제 본격적으로 바람직한 비상식량의 구성 요소를 살펴보자.
1. 물
음식보다 물이 먼저다. 인간은 음식 없이 삼 주를 생존하지만 물 없이는 사흘 이상 못 버틴다. 1인당 일일 물 소비량은 2~2.5L 수준이지만 비상식량을 꾸릴 때에는 4L를 기준으로 삼는다. 아무래도 병에 밀봉 포장된 생수가 가장 안전하고도 확실하다. 모든 비상식량에 적용되는 원칙을 따라 생수도 유통기한을 확인해 들여 놓았다가 일자에 맞춰 소비하고 새 제품으로 교체한다. 만약 생수가 떨어졌다면 궁여지책이나마 주변의 수자원을 여과 및 살균 소독해 사용할 수 있다. 침전물이 있거나 물의 색이 맑지 않은 경우 눈이 고운 천이나 커피필터 등으로 거르면 여과할 수 있다. 눈으로 보아 물이 깨끗하고 맑아 보인다면 여과는 거치지 않아도 되지만 살균과 소독은 반드시 거쳐야 한다. 불을 피울 수 있는 상황이라면 1분 동안 팔팔 끓인 뒤 식혀 먹고, 그러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염소계 표백제를 따로 갖춰 둔다. 표백제의 기준량 및 소독 요령은 각 제품의 지시사항을 참고한다.
2. 마른 음식류
수분이 적은 음식은 부패 없이 상온에서 오래 보관할 수 있고 휴대도 대체로 간편하다. 게다가 빠진 수분만큼 맛과 영양분이 농축되므로 양 대비 에너지 효율이 좋다. 비상식량 자격을 갖춘 마른 음식의 종류는 꽤 다양하다.
-육포: 육포는 소 홍두깨 등 기름기가 적거나 거의 없는 부위를 염장 건조해 만든다. 따라서 대체로 질기고 딱딱하며 짜다. 따라서 주 단백질원보다는 연명을 위한 비상식량의 최후의 보루쯤으로 여긴다. 물론 조리가 가능한 상황에는 육포를 삶아 부피도 늘리고 질감도 개선시켜 먹을 수 있다.
-건과류와 견과류: 후자는 정확히 마른 음식은 아니지만 수분이 적어 오래 보관할 수 있고, 단백질과 지방의 공급원으로 제 몫을 톡톡히 한다. 아몬드, 캐슈넛, 브라질넛 등을 무염 제품으로 구매하는 한편 별도로 땅콩버터도 준비한다. 단백질과 지방이 풍부하고 열량이 높을뿐더러 상온에서 오래 보관할 수 있어 땅콩버터는 우수한 비상식량 후보이다. 한편 건과류는 열량과 비타민의 공급원이면서 진한 단맛과 신맛을 갖춰 비상식량의 디저트 노릇을 톡톡히 할 수 있다. 포도, 살구, 자두, 망고, 파인애플, 파파야 등 선택의 폭도 넓다.
-건빵/크래커류: 건빵이 대대로 선원이나 군인의 대표 비상식량 역할을 맡아온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수분을 적게 쓴 밀가루 반죽을 구워 만들어 꽤 오래 두고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원리로 치즈와 함께 먹는 크래커류 또한 비상 탄수화물로 훌륭하다. 건빵이나 크래커는 그냥 먹을 수도 있지만 취사가 가능한 상황에는 다른 국물 음식에 섞어 먹을 수도 있다. 음식의 부피를 늘릴 수 있는 한편, 원래 딱딱한 탄수화물을 훨씬 더 부드럽고 편안하게 먹을 수 있어 일석이조이다.
-분유: 아기 음식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분유는 말 그대로 수분을 빼고 가루로 가공한 우유이니 휴대가 편하고 유통기한도 길다. 물론 육아용이 아닌 제품도 있다. 물을 더해 환원유로 만드는 게 원칙이지만 급할 때는 그냥 먹을 수도 있다.
-소금과 설탕: 유통기한 자체가 없는 소금과 설탕은 조미료보다 생존의 최후 요소로 여기고 준비한다.
3. 통조림류
애초에 전장을 위한 보존 식품으로 개발된 병조림이 조상이니 비상식량으로서 통조림의 자격에 대해서는 길게 늘어놓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단백질: 한국에서는 참치나 닭가슴살이 통조림 가운데서도 단백질 공급원으로 가장 보편적이다. 유통기한이 워낙 길다보니 한번 갖추면 자주 교체하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다.
-과일류: 견과류도 제 몫을 하지만 복숭아를 위시로 통조림 과일만의 매력이 비상식량 속에서 빛날 것이다. 과일도 과일이지만 함께 담긴 국물, 즉 시럽도 열량 보충에 그만이다.
4. 장기보관이 상대적으로 가능한 과채류
신선식품은 원칙적으로 배제한다고 언급했지만 상대적으로 저장성이 좋은 것들을 상비하자. 사과나 오렌지 등의 감귤류, 단호박, 그리고 감자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특히 감자의 경우 영화 ‘마션’에서 등장한 것처럼 비상시에는 재생산이 가능한 작물 역할도 할 수 있음을 잊지 말자.
5. 초콜릿과 사탕
비상식량에도 즐거움의 여지를 남길 수 있다. 초콜릿이나 사탕 같은 단 음식은 부피가 적고 열량이 높아 비상식량 자격을 충분히 갖췄으므로 생존을 위해 갖춰 때로 즐거움을 위해 먹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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