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한나 아렌트
편집자주
2020년대 지구적 사회 변동의 탐색을 통해 세계와 한국의 미래를 생각합니다. 매주 화요일 <한국일보> 에 연재됩니다. 한국일보>
시대를 초월해 던져지는 질문 중 하나는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물음이다. 우리 인간을 카를 마르크스는 ‘노동하는 존재’로, 요한 하위징아는 ‘놀이하는 존재’로, 리처드 세넷은 ‘공작하는 존재’로, 그리고 제러미 리프킨은 ‘공감하는 존재’로 파악했다. 오늘 내가 주목하려는 것은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인간론이다. 아렌트의 인간학을 살펴보려는 까닭은 이 2020년대도 결국 우리 인간이 만들어간다는 사실에 있다.
‘인간의 조건’
아렌트는 문제적 사상가다. 여기서 문제적이란 아렌트의 사상이 인간과 세계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는 의미다. 아렌트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정치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문제제기하고 이에 응답함으로써 사회사상 및 정치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아렌트의 주요 저작들로는 흔히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손꼽힌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일 것이다. 이 저작에서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 테제를 내놓았다.
아렌트가 발견한 것은 아이히만이 악마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명령을 충실히 수행했을 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하지 않은 아이히만의 행동이 대량 학살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무능력이 악의 근원임을 주장함으로써 아렌트는 사유의 중요성을 환기시켰다.
1958년에 출간된 ‘인간의 조건’은 아렌트의 철학적 인간학을 대표하는 저작이다.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적 삶(vita activa)’을 이루는 세 가지 활동을 구분한다. ‘노동’, ‘작업’, ‘행위’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아렌트가 특히 중시한 것은 행위다. 행위란 공동체 안에서 타인을 승인하고 소통을 나누며 공적 가치를 실현하는, 즉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활동을 의미한다.
아렌트에 따르면, 이 행위의 역사적 원형은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 아테네에서 찾을 수 있다. 아렌트가 주목한 것은 폴리스에서의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분리다. 공적 영역은 자유로운 시민들이 공공의 일에 대해 말하고 소통하는, 폴리스 전체의 공공선을 위해 함께 토론하는 공간을 뜻한다. 아렌트는 이러한 토론의 행위가 다름 아닌 정치 본래의 의미라고 파악한다.
아렌트가 우려한 것은 근대 서구사회에서 이러한 ‘공·사 이분법’의 해체다. 근대 자본주의가 등장하면서 노동이 다른 활동들을 압도하고 사적 영역이 공적 영역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폴리스적 의미에서의 공적 영역은 단순한 행정 영역으로 변형되거나 쇠퇴해버렸다. 이러한 근대의 과정이 지구로부터 탈출하고 세계로부터 도피하려는 이중적 의미의 ‘세계 소외’를 가져왔다는 게 아렌트의 진단이었다.
아렌트의 대안은 ‘세계 사랑(Amor Mundi)’이었다. 아렌트 전기를 쓴 엘리자베스 영-브륄에 따르면,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의 책 제목을 ‘세계 사랑’으로 붙이기를 원했다. 세계 사랑이란 인간의 존엄성 및 복수성, 그 안에 존재하는 공동선에 대한 태도를 말한다. 공적 영역의 회복과 공공성의 구현은 세계 사랑이 지향하는 정치적 목표였다.
널리 알려졌듯 아렌트는 독일에서 유태인으로 태어나 나치의 탄압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가 무국적자로 살다가 시민권을 얻어 활동했다. 아렌트의 인생은 서구사회에서 ‘세계 시민’으로서의 삶을 상징했다. 실존 및 영혼에 대한 배려로서의 ‘자아 사랑’과 이데올로기 및 주관주의의 ‘세계 멸시’에 대응해 세계 사랑을 열렬히 옹호함으로써 아렌트는 철학적 인간학과 정치이론의 새로운 사상적 토대를 마련하려고 했다.
2020년대와 인간의 미래
1975년 아렌트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사상은 더욱 높이 평가됐다. ‘아렌트 르네상스’라고 부를 정도로 아렌트는 전후 가장 중요한 정치사상가의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됐다. 아렌트의 사상이 시간의 풍화를 견뎌낸 까닭은 인간 존재와 공공성에 대한 심원한 통찰에 있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생계를 모색하는 ‘노동’, 의미를 추구하는 ‘작업’, 타자와 소통하는 ‘행위’에 대한 아렌트의 통찰은 탁월한 것이다. 후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인간에겐 생계, 의미, 소통 모두 중요하다. 생계를 위한 노동의 미래, 의미를 위한 삶의 미래, 소통을 위한 민주주의의 미래는 단기적이든 장기적이든 우리 인류 미래를 결정짓는 핵심 요소들이라 할 수 있다.
아렌트는 보수와 진보 가운데 어느 하나에 귀속시키기 어려운 사상가다. 역사학자 토니 주트는 정중함과 중용, 공적 담론의 회복을 포함하는 아렌트의 공화주의적 사유를 현대 정치이론의 새로운 출발로 삼을 수 있다고 평가한다. 여기서 공화주의적 사유란 자유를 존중하는 동시에 공공성을 중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렌트에게는 개인의 철학과 공동체의 정치가 모두 중요하다. 아렌트는 ‘철학 없는 정치’와 ‘정치 없는 철학’을 모두 경계함으로써 존재와 사회 사이의 새로운 가교를 놓으려고 했다.
2020년대가 열린 현재, 아렌트의 인간학을 소환하는 까닭은 뭘까. 두 가지를 주목하고 싶다. 하나는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이 갖는 중요성이다. 우리 인간이 가치 있는 삶을 일궈가기 위해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깊이 있고 포괄적인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
앞서 말했듯, 리프킨은 우리 시대를 ‘공감의 시대’로, 우리 인간을 ‘공감하는 존재’로 파악한 바 있다. 리프킨이 강조하듯, 오픈 소스와 협력이 이끄는 21세기 과학기술혁명 시대에 자기와 타자, 개인과 사회의 생존을 위해 무엇보다 요구되는 것은 공감 능력이다. 이러한 공감의 토대를 이루는 것이 다름 아닌 자신 및 타자와의 소통이다.
“이 세계에서 행위하며 살아가는 복수의 인간들은 자신과 타인에게 의미 있는 말을 할 수 있는 경우에만 유의미성을 경험할 수 있다.” ‘인간의 조건’에 나오는 아렌트의 말이다. 아렌트에게 ‘행위하는 복수의 인간들의 소통’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이유이자 조건이다. 이 소통이 공감의 출발점이자 기반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개인과 공동체에 대한 성찰이다. 공동체의 존재 이유를 지나치게 부각시킬 경우 개인은 자유를 억압당할 수 있다. 동시에 공동체의 존재 이유가 의미를 상실할 경우 개인은 ‘만인 대 만인의 투쟁’에 마주하게 된다. 최근 코로나19 팬데믹의 대처에서 볼 수 있듯, 오늘날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해야 하는 것은 어느 사회든 중대한 과제다.
바로 여기에 아렌트의 통찰은 적절한 답변을 선사한다. 아렌트는 자유와 공공성을 동시에 강조한다.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가 반드시 대척적인 이념은 아니다.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동시에 공동체의 연대를 중시하는 것은 실현가능한 기획이다. 자유와 공공성을 동시에 증진시키려는 아렌트의 인간학적, 정치학적 상상력은 2020년대 현재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사회와 아렌트
아렌트의 사상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함의는 뭘까. 먼저 주목할 것은 공적 영역의 중요성에 대한 발견이다. 역사학자 조승래는 ‘공공성 담론의 지적 계보’에서 아렌트의 기여가 공적 영역의 중요성을 계몽한 데 있다고 봤다. 이 공적 영역에 참여해 민주적 제도를 만들고 지켜나가는 것이 현대사회에 부여된 매우 중대한 과제라는 것이다.
지난 30여 년간 우리나라 민주화를 이끈 것은 ‘사회운동에 의한 민주화’였다. 여기에는 시민운동의 역할이 중요했다. 시민운동의 기여는 공적 영역에 참여해 민주적 제도를 일궈왔다는 데 있었다. 금융실명제, 부패방지법, 호주제 철폐 등은 그 구체적인 성과였다. 이러한 사회운동에 의한 민주화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공적 영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시민들의 열망과 열정이었다.
2020년대가 열린 현재, 우리 사회가 직면한 중대한 과제 중 하나는 질 높은 사회통합을 일궈가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이념·계급·젠더·세대갈등, 더하여 개인과 공동체의 긴장은 심각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긴장과 갈등을 완화하고 해소하여 성숙한 민주공화국으로 나아가는 것은 새로운 국가적 과제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은 본디 소통하는 존재다. 그리고 좋은 정치와 민주주의는 바로 이 소통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아렌트의 메시지다. 인간의 존엄성과 복수성을 승인하고, 그 안에 존재하는 공동선을 추구하는 아렌트의 세계 사랑은 2020년대 우리 사회 미래 전망을 위한 인간학과 정치학의 출발점으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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