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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죽었다

입력
2020.09.28 04:30
수정
2020.09.28 08:01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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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도출한 평양공동선언문에 서명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18년 9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도출한 평양공동선언문에 서명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살고자, 어떻게든 살고자 사나운 바다를 견뎠다. 배를 타고 누군가 다가왔다. 말이 통했다. '살았구나. 땅을 밟겠구나. 그만 춥겠구나. 어떤 꼴로든 다시 살게 되겠구나… 어어, 왜 배로 올려 주지 않지? 뭐가 잘못된 거지?'

방독면 쓴 그들이 다시 나타났다. 축 처진 그의 몸을 조준해 총을 갈겼다. 기름을 쏟아 부어 처참한 흔적을 소각했다. 다시 암흑. 그리고 38시간이나 조용했던 그의 조국.

47세, 원양어선을 타며 바다를 배운 해양수산부 8급 공무원, 서해 어업지도선 '무궁화 10호'의 일등항해사, 두 아이의 아버지. 'A씨'라고 언론이 부르는 그는 그렇게 사라졌다. 군은 그가 살해당한 경위를 브리핑하면서 "북한의 의도적 만행"이라고 확언했다.

하루 만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사과했다. "대단히 미안하다"고 했다. 북한의 통지문을 청와대는 가감 없이 공개했다. 만행을 "실수"로 축소하고, 우리 정부의 경고를 "불경스럽다"고 비아냥댄 대목까지 언론사 카메라 앞에서 읽어내렸다. 그저 사고였을 거라고, 김 위원장이 지시한 건 아닐 거라고, 알리바이라도 만들어 주고 싶었던 걸까.

문재인 정부와 가까운 실력자들은 북한 최고 존엄의 신속한 사과에 감격했다. 노무현재단 유튜브 방송에 나와 "계몽 군주"가 보낸 "희소식"이며, "북미관계를 푸는 좋은 시그널"이니 "남북 공동올림픽 개최의 계기"로 삼자고 반색했다. 국가가 지키지 못한 국민의 유해를 찾기도 전에 빙긋 웃는 그들의 모습은 기괴했다. 전례 없는 사과가 아니라 한 번도 없어야 할 죽음이었다. 대의를 위한 제물 취급해도 되는 타인의 죽음은 없다. 너무 기뻐서 잠시 깜빡한 걸까.

청와대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이달 초 주고받은 친서도 들춰냈다. "남녘과 북녘의 동포"를 서로 걱정하는 살뜰한 문장을 전부 낭독하는 것으로 남북관계가 알고 보면 파탄이 아님을 자랑했다. 그 사이 A씨의 죽음은 지워졌다. 그는 어쩌다 죽은 사람이 됐다.

A씨는 죽어서도 억울했다. 이혼했다, 어딘가에 중독돼 빚이 수천 만원 쌓였다, 그 모든 걸 등지고 월북하려 했다는 유의 말이 국회와 정부에서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초엘리트도, '표준'에 가까운 시민도 아니었으므로 그를 잃은 책임이 대단하진 않다는 핑계는 아니었을까. 그런 한 명 때문에 한반도 평화로 가는 가뜩이나 험한 길이 멈칫해선 안 된다는 선전은 혹시라도 아니었을까.

정부는 A씨의 죽음을 충분히 애도하기도 전에 죽음 이후를 걱정했다. 부서지기 직전의 유리 그릇을 손에 든 양, 문 대통령의 한반도 평화 구상이 망가질까 초초해했다. A씨가 죽고 116시간이 지난 27일에서야 청와대는 진상 조사와 시신ㆍ유류품 수습을 위한 남북 협력을 제안했다.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하지 않은 탓에 우리는 보이지 않는 고통을 호흡하며 산다. 평화를 실현하겠다는 문 대통령의 약속을 믿지 않았을지언정, 지지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A씨의 죽음에 대처한 방식을 보면, 청와대가 지키려 하는 게 '평화'인지, '평화를 공약한 대통령'인지 혼란스럽다. 사람이 먼저라더니, 훗날 역사책에 기록될 한 줄이 먼저는 아닌지 걱정스럽다.

A씨를 지키지 못하고, 평범한 많은 사람들이 당장 누리지 못한 채 거창한 약속으로 존재하는 평화란 얼마나 공허한가.


최문선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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