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코로나 명절
친지모여도 험악한 정치얘기는 피해야
지금은 분노 대신 위로 시간이 되도록
5일이나 되는 추석 연휴인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양가 부모님 모두 돌아가신 뒤로는 긴 명절이면 일찌감치 여행 계획을 짜곤 했지만, 이번엔 그냥 손 놓고 있다. 나만 그런가 싶어 주변 사람들한테 물어봤더니 다 비슷했다. 코로나 이후 처음 맞는 명절, 요즘 표현대로 하면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추석 나기를 하게 됐다.
코로나 때문에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는 상황에서 추석을 알차게 보낼 묘안은 없다. 대신 좀 슬기롭게 보낼 방법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봤더니,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말조심이었다. 예년 같지는 않아도 귀향은 꽤 있을 테고, 내려가지 않더라도 친척 친구 선후배들과는 어울릴 것이다. 오랜만에 반갑게 만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눌 텐데, 이때 정치 얘기만은 꼭 피하는 게 좋겠다.
작년 추석연휴가 끝난 뒤, 지인들로부터 친지들과 즐겁게 모였다가 찝찝하게 헤어졌다는 얘기를 적잖게 들었다. 조국 장관 파동으로 사회가 두 동강 났던 시기라 무슨 주제로 시작하든 대화는 조국 문제로 귀결됐고, 결국 오랜만에 만난 친척 친구들과 언성 높이고 얼굴 붉히면서 자리를 파했다고 한다. 올해라고 뭐 다를까 싶다. 대상이 조국에서 추미애로 바뀌었고, 부동산과 세금 불만이 더 커졌고, 이낙연 이재명에 대한 ‘비교 품평’이 시작됐다는 것 말고는 기본적으로 작년과 대동소이한데, 괜히 정치 얘기 꺼냈다가는 고성으로 끝날 확률이 아주 높다. 아무리 친척이고 친한 친구라 해도 상대방의 정치적 입장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자기 견해를 단정적, 공격적으로 쏟아내는 건 아주 위험한 행동이다.
밥상머리 혹은 술자리 정치 담화는 누구나 한마디씩 할 수 있고, 정확한 지식과 정교한 논리가 없어도 용인되며, ‘카더라’에 욕설까지 섞어도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장점’은 있다. 하지만 아무리 오래 떠들어도 결론이 없고, 말할 때는 시원한 것 같은데 막상 끝나면 남는 게 없으며, 그런데도 중독성과 확증편향성이 강해 모이기만 하면 똑같은 얘기를 더 강하게 하게 되고, 결국 훈훈한 마무리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약점’이 있다. 정을 나누고 쌓였던 앙금도 털어내는 게 명절인데, 오히려 화만 부추기고 좋았던 사이마저 갈라놓는 그런 대화를 왜 해야 하나. 한국은 이미 정치과몰입 사회가 되었고, 중년 이상은 어쩌다 정치과몰입 세대가 되었지만 그래도 코로나에 짓눌린 올해만큼은 평화로운 추석 명절을 위해 정치의 정자도 꺼내지 않았으면 한다.
연배 차이가 있는 모임이라면 세대 간 갈등 소재도 피하는 게 좋겠다. 훈육이 기성세대의 의무인 건 맞지만, 세상이 달라졌고 세대가 다르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 한 역효과만 날 뿐이다. 차분히 듣고, 듣다가 '욱'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면 아예 꺼내지도 않는 편이 낫다. 종교 얘기도 하지 않는 게 좋다. 특히 전광훈 목사나 사랑제일교회 유의 행태를 이유로 기독교 전체를 조롱하거나 모독하지 않았으면 한다.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세상에서,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명절을 맞고 있다. 부유한 사람들, 월급 꼬박꼬박 받는 직장인 공무원에겐 5일이 황금연휴겠지만, 손님이 없어도 문을 열어야 그나마 몇 푼이라도 손에 쥐는 동네 식당과 가게 주인들, 그 가게 종업원들에게 5일 연휴는 참으로 가혹한 시간이다. 방역 때문에 귀향을 포기한 경우도 있지만, 직장 잃고 점포 문닫아 도저히 고향집에 내려갈 수 없는 사람들도 숱하게 많다. 이들을 한번 생각해 보자.
그래도 1년에 한 번뿐인 추석인데, 반가운 사람끼리 모처럼 만나 싸우고 성낼 이유가 없지 않나. 힘들고 화나지만 지금은 이해, 배려, 위로, 격려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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