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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여성·이슬람… 아프간 '평화 협상'을 읽는 세 가지 코드

입력
2020.09.26 18:0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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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아프가니스탄 정부와 탈레반의 평화협상에서 한 참석자가 마스크를 쓰고 회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도하=AP 연합뉴스

12일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아프가니스탄 정부와 탈레반의 평화협상에서 한 참석자가 마스크를 쓰고 회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도하=AP 연합뉴스

이달 19일 아프가니스탄 공군은 북부 쿤두즈 지방 탈레반 통치구역인 칸 아바드 지구에 두 차례 공습을 가했다. 아프간 국방부는 이번 공습이 탈레반 기지를 목적으로 했고 탈레반 대원 30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민간인들도 10여명 숨진 것으로 알려지면서 비난이 일자 진상조사를 하겠다며 서둘러 수습했다. 공습은 12일 카타르 수도 도하에서 아프간 정부 측 평화협상단과 탈레반 대표단이 ‘아프간 내부 평화협상’이라는 대장정에 첫 발을 내디딘 지 정확히 일주일 만에 일어났다.

도하 협상 개시 전후로도 아프간 곳곳에서는 탈레반의 크고 작은 공격이 계속됐다. 거의 한 세대에 준하는 20년 동안 지속된 적대 행위가 쉽게 중단될 리 만무했다. 정부협상단을 이끌고 있는 압둘라 압둘라 아프간 국가화해고등위원회(HCNR) 위원장은 12일 평화협상 개막 기조연설에서 “(올해 2월) 미국과 탈레반이 평화 합의에 사인한 후에도 2,000명이 넘는 아프간인들이 희생됐고 1만5,000명이 다쳤다”면서 즉각적인 휴전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그 동안 탈레반은 아프간 정부가 미국의 꼭두각시라며 협상 파트너로 인정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던 탈레반 반군이 정부를 비롯한 아프간 내부 구성원들과 협상 테이블에 앉기까지 크게 두 가지 조건이 있었고, 전부 수용됐다. 하나는 내년 중순까지 군대를 완전 철수하겠다는 미국의 약속을 받아 낸 것. 또 다른 요구는 아프간 정부만이 집행할 수 있는 사안, 즉 탈레반 수감자 석방이었다. 바람은 실현됐다. 탈레반 포로 5,000명과 탈레반 감옥에 갇혀 있던 아프간 군 수감자 1,000명이 ‘전쟁 포로 맞교환’ 형식으로 석방됐다.

탈레반이 석방을 요구한 명단 면면을 보면 그들의 치밀한 전략이 감지된다. 아프간 현지 매체 아프간이슬라믹프레스의 2일 보도를 보면 이틀 동안 풀려난 탈레반 포로 200명 중 알카에다 인도대륙지부(AQIS) 전 지도자 아심 우마르의 아내가 포함됐다. 우마르는 지난해 9월 탈레반 세력이 강한 아프간 남부 헬만드주(州)의 무사칼라 지역 전투에서 사망했고, 그의 아내 등 몇몇 외국인 여성들은 아프간 정부군에 체포됐다. 미 보수성향 민주주의수호재단(FDD)이 운영하는 안보전문매체 롱워저널에 따르면 탈레반은 우마르의 아내를 포함해 방글라데시ㆍ파키스탄 출신 여성 등 여성 수감자 3명을 ‘매우 중요한’ 인물로 지칭하며 석방을 요구해왔다고 한다.

언뜻 보면 동료 전사들의 아내 석방을 중시한 대목이 인상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평화협상 과정에서 탈레반에게 여성 이슈는 관심 밖의 일이다. 그간 여성 인권과 연계된 의제들에 대해 이슬람 극단주의와 가부장적인 접근을 고수해온 탓이다. 여성 인권 문제는 협상에서 아예 의제에도 오르지 못할 것이란 회의적 시각이 팽배하다.

7월 아프가니스탄 정부와 탈레반의 포로교환 협상에 의해 칸다하르 교도소에 갇혀 있던 탈레반 수감자들이 풀려나고 있다. 칸다하르=EPA 연합뉴스

7월 아프가니스탄 정부와 탈레반의 포로교환 협상에 의해 칸다하르 교도소에 갇혀 있던 탈레반 수감자들이 풀려나고 있다. 칸다하르=EPA 연합뉴스

아프간 정부로 범위를 넓혀 봐도 협상단 21명 중 여성은 4명뿐이다. 물론 탈레반 쪽은 전무하다. 전직 국회의원 포지아 쿠피는 정부 측 여성 4명 가운데 한 명이다. 탈레반에 남편을 잃은 그는 암살 위기에서 두 번이나 살아남았다. 누구도 소행을 자처하지 않은 두 번째 암살 시도는 불과 한 달 전인 지난달 15일에 발생했다. 포지아는 당시 입은 총격 피해로 팔에 붕대를 감은 채 협상에 임하고 있다. 협상 11일 째인 23일, 포지아는 트위터에 “(이번 협상에서) 오랫동안 지속된 여성들의 투쟁과 그 덕분에 일부라도 쟁취한 권리가 평화라는 미명 아래 타협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점이 두렵다”고 적었다. 여성 문제가 협상 후순위로 밀리거나 아예 의제에도 포함되지 않을 수 있다는 불안감이 읽힌다.

협상 분위기가 이렇게 돌아가자 아프간독립인권위원회(AIHRC)는 12일 보도자료를 통해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포괄적 원칙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인권위는 포괄적 원칙에 반드시 들어가야 할 그룹으로 여성과 각종 소수자, 전쟁 피해자들을 콕 집어 언급했다. 현지에서 아프간 협상단의 다른 여성 일원인 하비바 사라비의 역할을 주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여성으로서 아프간 최초인 바미안 주지사(2005~2013)를 지냈고, 여성부장관으로도 일했다. 아프간 소수민족인 하자라 출신이라는 희소성도 있다. 여성과 하자라, 이 두 정체성은 탈레반이 수도 카불을 장악하고 아프간을 지배했던 탈레반 1기(1996~2001) 시절 누구보다 탄압받고 억눌려온 이들이다. 9ㆍ11테러 후 미국의 침공으로 탈레반 정권이 무너지면서 반군으로 처지가 뒤바뀐 탈레반은 이른바 2기(2002~현재) 기간 동안 ‘민족주의’ 기치 아래 외세 축출을 최우선 목표로 싸우고 있다. 이 기간 탈레반이 하자라족을 탄압한 사례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탈레반이 평화협상을 거쳐 합법적으로 주류 정치권에 편입되면 여성 및 소수 커뮤니티에 대한 태도와 정책을 제대로 정립할지는 미지수다.

탈레반에 맞서 아프간 여성들 스스로 권리를 찾으려는 분위기도 포착된다. 아프간 유일의 여성 경찰사령관 코만더 피로자가 대표적이다. 헬만드 마르자 지구 시스타니 마을에서 아프간 경찰과 별도로 민병대 조직 ‘아프간 지역경찰’ 팀을 지휘하는 그는 탈레반에 무력으로 저항하는 독보적인 여성이다. 탈레반을 향한 그의 메시지는 간결하고 단호하다. “만일 탈레반이 여성은 사회활동을 할 수 없다거나, 군인이 될 수 없다거나, 교육받을 권리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 완전히 얼간이라는 사실을 자인하는 꼴이다. 아무도 그런 자들을 상대하지 않을 것이다.”

탈레반 측은 일단 신중한 협상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탈레반 측 협상단원이자 미 관타나모 수용소에 구금됐다 2014년 석방됐던 물라 카이룰라 카이르카는 “탈레반은 인권과 여성의 권리를 분명히 실천할 것”이라며 “우리부터 여성의 아들로 태어난 존재가 아닌가. 여성들은 신이 부여한 존중 받을 권리를 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 탈레반은 평화협상 과정에서 이전과는 다른 여성관을 내비치고 있다. 예컨대 교육은 물론 외출까지 금지했던 1990년대와 달리 여성 교육과 사회활동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단, 남녀가 분리된 공간에서 교육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체적으론 이슬람식 사회 건설에 방점이 찍혀 있다. 우선 새로운 통합정부의 아프간 사회에는 샤리아(이슬람 율법)가 적용돼야 하고, 전 분야에서 ‘보다 이슬람적인’ 코드가 강화돼야 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이미 국호에 ‘이슬람공화국’을 명시하고 한 주의 공휴일도 일요일이 아닌 금요일로 지키는 데에서 알 수 있듯, 아프간은 이슬람적 요소가 적잖이 스며있는 사회다. 또 세속주의 헌법을 근간으로 하되, 대통령 출마 자격을 무슬림으로 제한하는 등 이슬람에 대한 특혜 요소를 곳곳에 심어 놨다.

이에 더해 탈레반은 이슬람 수니파 학파 가운데 하나인 '하나피' 법제를 우선 보완 장치로 규정했다. 1인 1표식 참정권을 보장하는 보편적인 민주주의 모델에 이슬람적 요소를 충분히 가미한 사회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친(親)이슬람을 표방한 탈레반의 시대착오적 전략이 20년 전쟁 종식과 평화 정착을 갈망하며 아프간 구성원들이 어렵게 마련한 대화 테이블을 걷어차는 패착이 돼서는 안될 것이다.

이유경 국제분쟁전문 저널리스트

이유경 국제분쟁전문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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