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백신공급망 가입 미뤄... '통 큰' 외교 무색
"백신 우선 주겠다" 립 서비스... 생산 여력 부족
"美 이기적" 비난하더니 정략적 활용 가능성도
중국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발병 이후 전 세계 27개국에 의료팀을 파견하고 150여개국과 4개 국제기구에 방역물자를 지원했다. 해외로 수출한 중국산 마스크는 568억개, 방호복은 2억5,000만벌(5월 기준)에 달한다.
중국은 이 같은 '통 큰' 행보로 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도 자국 중심주의에 골몰한 미국과의 차별화를 꾀했다. 하지만 백신 개발을 앞두고 중국식 리더십의 본색이 드러나고 있다. 국제 협력체 참여를 주저하며 오로지 중국의 깃발 아래 우호세력을 끌어모을 심산이다. "백신은 공공재"라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강조가 무색해졌고 중국이 공들여온 공공외교의 기반도 흔들릴 조짐이다.
WHO "백신 다 함께 맞자"… 바람 잡던 중국은 빠졌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전 세계 코로나19 백신 공급체계인 '코백스(COVAX)'를 추진하고 있다. 한국을 포함해 156개국이 가입 의사를 밝혔다. 독일 노르웨이 캐나다 호주 등 국민소득이 높은 서구 64개국과 소득이 낮은 아시아ㆍ아프리카 92개국이다. 추가로 38개국이 동참할 예정이다. 가입국 인구를 합하면 전 세계의 64%에 달한다.
코백스는 내년 말까지 20억명에게 백신을 접종한다는 목표를 내걸었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WHO 사무총장은 22일(현지시간) "전염병 종식과 세계 경제 회복을 위한 가장 빠른 해법은 일부 국가의 모든 사람이 아닌 모든 국가에서 일부 사람이 백신을 맞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백신에 대한 접근권을 동등하게 보장해야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돈이다. 지금까지 모은 건 사업 필요자금 350억달러(약 40조7,000억원)의 9% 수준인 30억달러(약 3조5,000억원)에 불과하다. 사업을 본 궤도에 올리려면 당장 150억달러(약 17조4,000억원)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선 중국의 지원이 필수적이다. 실제 중국은 그간 "코백스를 지지하며 계속 협의하고 소통할 것"이라고 밝혀 왔다.
하지만 WHO가 전날 발표한 코백스 회원국 명단에 중국은 빠져 있다. 미국과 러시아는 일찌감치부터 "외국에 나눠줄 백신이 없다"며 불참 의사를 밝혔다.
'백신 공수표' 남발한 中, 지금은 '제 코가 석자'
중국은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등 최소 62개국에 코로나19 백신 우선 공급을 약속했다. 대략 25억명 분량이다. 게다가 11월부터는 자국민 14억명에 대한 백신 접종을 예고한 상태다.
하지만 백신 공급량은 내년까지 최대 4억명분에 그칠 전망이다. 수요와 공급 간 차이가 크다. 중국은 2018년 백신 파동으로 업체들이 생산량을 대거 줄인 터라 백신 개발을 완료해도 국제사회에 충분히 공급할 역량을 갖췄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증폭되고 있다.
이에 중국은 '립 서비스'에 주력하며 코백스와 거리를 두고 있다. 유로뉴스는 "중국이 코백스에 동참하면 코로나19 책임론으로 각인된 부정적인 이미지를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지만, 중국은 백신을 국제사회와 나눌 만큼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다. 관영 글로벌타임스는 23일 "중국은 일대일로ㆍ아세안ㆍ상하이협력기구(SCO) 회원국이나 이웃국가들과의 약속을 더 중시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코백스는 후순위란 얘기다.
'차이나 머니'에 기반한 신뢰, 백신에서 무너지나
사정이 이런데도 시 주석은 22일 유엔총회 화상연설에서 "개도국에 코로나19 백신을 우선 공급할 것"이라고 거듭 약속했다. 지난 5월 세계보건총회(WHA) 개막 당시 약속한 2년간 20억달러(약 2조3,000억원) 원조 계획을 재확인하면서 1억달러(약 1,160억원) 추가 지원 의사도 밝혔다. 어차피 코백스를 주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체면치레용으로 보일 수도 있는 출연 규모다.
중국은 코로나19 사태 와중에 공격적인 '마스크 외교'를 펼쳤다. 백신 개발도 양적ㆍ질적으로 가장 앞서 있다고 자부한다. 출시 전 마지막 단계인 3상 임상시험에 돌입한 9개 백신 중 4개가 중국산이다. 국제사회가 중국 백신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유다.
하지만 미국과 마찬가지로 백신을 독점하거나 정치적 필요에 따라 세 확보 수단으로 대상국을 선별 지원할 경우 거센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경우에 따라선 이기적이라고 비난하던 미국의 행태와 닮은 꼴이기도 하다. 가토 요시카즈 홍콩대 아시아글로벌연구소 교수는 "중국이 코로나19 백신을 놓고 신뢰를 잃는다면 국제사회는 중국의 행동과 의도를 계속 의심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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