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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10·점100이 부른 죽음...화투가 뭐길래

입력
2020.10.01 10:00
수정
2020.10.01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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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끗에 시비 붙고 앙심 쌓여…흉기로 찌르고 농약타고

'꽃의 전쟁' 화투(花鬪). 게티이미지뱅크

'꽃의 전쟁' 화투(花鬪). 게티이미지뱅크

집집마다 한 벌은 있을 법한 놀이 겸 도박 도구 '화투(花鬪)'. 조선 말에서 일제강점기 사이 일본에서 넘어온 문화로 '꽃의 전쟁'이라는 뜻을 갖고 있죠. 명절마다 빠지지 않고 어르신들 사이에 감초 역할을 하기도 하는데요. 화투를 치던 중 패가 붙지 않는 사람이 돈을 잃다 감정이 상해 결국 판을 엎는 장면도 종종 보이곤 합니다.

최근 이 화투판을 둘러싼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져 눈길이 쏠리고 있는데요. 성남 분당구 금곡동의 한 아파트에서 지난달 19일 60대 남성이 70대 여성 2명을 흉기로 찔러 살해한 혐의로 구속되는 사건이 벌어진 겁니다. 경찰은 이 남성이 당일 저녁 피해자들과 함께 화투를 치다가 시비가 붙어 범행을 저지르게 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경찰이 맞다면 '점당 100원짜리 화투가 부른 죽음'인 셈입니다. 여기서 기시감이 드는 분들도 있을 텐데요. 사실 화투판이 촉발한 살인 사건은 하루이틀 일이 아닙니다.

30년 지기 할머니들 살해...'상주 농약 사이다 사건'

2015년 12월 8일 한국일보 2면에 실린 '상주 농약 사이다' 사건 관련 기사. 한국일보 자료사진

2015년 12월 8일 한국일보 2면에 실린 '상주 농약 사이다' 사건 관련 기사. 한국일보 자료사진

5년 전 세상을 술렁이게 했던 '상주 농약 사이다' 사건을 기억하시나요. 2015년 7월 14일, 경북 상주 공성면의 한 시골마을에서 기이한 일이 발생합니다. 마을회관 냉장고에 있던 사이다를 마신 할머니 6명이 차례로 쓰러진 것인데요. 이 사이다에서는 메소밀이라는 살충제 성분이 검출됐습니다. 결국 2명이 숨지고 4명이 중태에 빠졌고요.

이 사건의 범인으로 같은 마을에서 수십년을 이웃으로 살아온 80대 박모 씨가 지목되면서 큰 충격을 안겼습니다. 박씨는 유일하게 사이다를 마시지 않았는데요.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된 1심에서 배심원 7명이 만장일치로 유죄 평결을 내렸습니다. 1심 재판부는 그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고 항소심은 물론 대법원에서도 이 판결이 확정됐죠.

당시 재판에서 쟁점이 됐던 부분도 바로 '화투'인데요. 30년 이상 어울려 온 이 할머니들은 평소 마을회관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화투놀이를 하며 보냈다고 합니다. 사건 전날도 점당 10원짜리 화투놀이를 하다 다퉜다는 진술이 나오면서 범행 동기를 두고 검찰과 변호인 측이 팽팽히 맞섰는데요. 한국일보가 확인한 당시 판결문에서 자세한 상황을 엿볼 수 있습니다.

검찰 측은 수사 결과 박 씨가 화투놀이 중 속임수를 종종 썼고, 피해 할머니들이 이를 지적해 서로 다투는 일이 잦았다고 파악했는데요. 마을회관에 '싸우지 마세요'라는 문구가 붙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감정이 쌓이던 중 사건 전날엔 화투놀이를 하다 피해 할머니 중 한 사람이 패를 집어던지고 나와버리기까지 하는 큰 다툼이 있었다고 하고요.

이후 박씨가 평소 못마땅하게 여겼던 피해자들을 살해하기로 마음먹고 미리 박카스 한 병에 메소밀 성분의 농약을 준비, 마을회관의 사이다병에 몰래 부은 뒤 이를 밥그릇에 따라 피해자들에게 1잔씩 마시도록 권했다는 겁니다. 피해자들이 기어다니며 입에 거품을 물고 의식을 잃는 동안 함께 마을회관 안에 있으면서도 구조 요청을 하지 않았고요.

2심 재판부 "화투로 인한 갈등, 충분한 살해 동기" 인정

2015년 12월 12일 한국일보 4면에 실린 '상주 농약 사이다' 사건 관련 기사. 한국일보 자료사진

2015년 12월 12일 한국일보 4면에 실린 '상주 농약 사이다' 사건 관련 기사. 한국일보 자료사진

다만 박씨의 변호인 측은 피해자들과 마을회관에서 화투를 치며 지낸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점당 10원짜리 화투놀이를 하다 싸웠다'는 피해자 진술의 진위 여부가 확인되지 않았다며 살해 동기가 없다고 주장했죠. 아울러 검찰이 박씨의 메소밀 구입·투입 경로에 대한 직접 증거를 제시하지 못 했다는 점을 들어 사실이 아니라 반박했고요.

박씨는 일관되게 "억울하다"는 입장이었는데요. 법원은 현장의 사이다와 박카스 뚜껑에서 검출된 메소밀 성분은 물론 박씨의 주거지에서 발견된 남은 박카스 병들의 제조번호·유효기간이 동일한 점에 주목했습니다. 이 마을의 다른 40세대에서는 제조 번호와 일자가 동일한 박카스병은 발견되지 않았죠.

박씨의 옷과 전동차, 지팡이에서도 메소밀 성분이 검출됐고요. 박씨는 피해자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진술했지만 상황을 알고도 마을 이장이 오기 전까지 구조 요청을 하지 않았던 데다, 현장에서 할머니들이 쓰러진 원인에 대해 '사이다를 먹고 그렇다'고 정확히 원인을 지목한 점 등을 들어 재판부는 유죄로 판정했습니다.

특히 범행 동기와 관련해 항소심(2심) 재판부는 검찰 측의 주장을 받아들여 '화투'가 원인일 수 있다고 인정했는데요. 판결문에는 "피고인은 평소 화투를 치면서 피해자와의 사이에 다툼 갈등이 있었고, 여기에 평소 억눌러 왔던 분노가 표출돼 이 사건 범행에 이르게 됐다"며 "이런 사정이 일반인 입장에서는 살해 동기로 이해되기 어려울지라도 피고인 입장에서는 충분했다고 할 것"이라고 나와있습니다.

이듬해 '농약 소주' 사건…끊이지 않는 화투판 둘러싼 참극

2016년 3, 4월 한국일보 지면에 실린 '청송 농약 소주' 사건 관련 기사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16년 3, 4월 한국일보 지면에 실린 '청송 농약 소주' 사건 관련 기사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16년 5월 '청송 농약 소주' 사건 관련 한국일보 온라인 기사. 한국일보 자료사진

2016년 5월 '청송 농약 소주' 사건 관련 한국일보 온라인 기사. 한국일보 자료사진

평온해보였던 시골 마을에서 벌어진 참극에 당시 여론은 경악을 금치 못 했는데요. 숨 고를 새도 없이 이듬해 3월 비슷한 사건으로 다시금 '화투'가 수면 위로 올라왔습니다.

2016년 3월 9일 경북 청송군 현동면의 작은 마을에서 농약 사이다 사건과 범행 도구와 방식까지 흡사한 '농약 소주' 사건이 벌어진 겁니다.

이번에는 마을회관 소주에 메소밀 성분 농약이 들어있었고, 이 사실을 모르고 이를 마신 마을 이장이 사망했는데요. 같이 마신 주민 역시 중태에 빠졌습니다. 너무도 비슷한 구조에 '제2의 농약 사이다 사건'이라 불리며 모방 범죄가 아니냐고 지역 사회가 발칵 뒤집혔죠. 경찰은 당시 주변 탐문 및 농약·유전자 감정 결과를 토대로 70대 남성 주민을 용의자로 특정했는데요.

이 용의자가 자신의 축사에서 같은 농약을 마시고 숨진 채 발견되면서 사건은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됐습니다. 때문에 정확한 동기를 파악할 수는 없게 됐지만 여기서 또 한 번 '화투'가 등장합니다. 평소 마을회관에서 주민들이 수시로 화투판을 벌였는데, 아내가 자주 화투를 즐기는 것에 그가 불만을 품어온 것으로 조사된 것이죠.

사건이 일어난 당일에도 마을 주민들은 점당 100원의 화투놀이를 벌였다고 하는데요. 용의자는 화투놀이에 대한 불만과 관련해 경찰의 거짓말 탐지기 조사가 예정돼있던 당일, 앞서 거짓말 탐지기를 경험한 아내에게 질문 내용을 상세히 캐묻는 등 불안한 모습을 보이다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일제강점기부터 '화투 살인' 기록…87년엔 '고스톱통일안'

한국일보 1987년 3월 15일 10면(왼쪽), 2000년 4월 26일 31면에 실린 화투 관련 기사.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국일보 1987년 3월 15일 10면(왼쪽), 2000년 4월 26일 31면에 실린 화투 관련 기사. 한국일보 자료사진

심지어 1925년의 기사에서도 당시 인천에서 화투를 치다 말다툼 끝에 살인이 벌어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1956년에도 충남의 한 시장에서 돈내기 화투판을 벌였다 흉기로 상대방을 살해하고 현금을 챙겨 도주한 사건, 전남의 가정집에서 화투를 하다 돈을 잃은 게 화근이 돼 언쟁 끝에 구타로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 등이 발생했고요.

오죽하면 1987년에는 '전국고스톱통일안'이라는 출처 불명의 인쇄물까지 나돌았는데요. 5장 32개조에 부칙 2개조로 이뤄진 이 안에는 "고스톱 규정시비로 살인 행위까지 벌이는 등 사회문제로 대두돼 이를 막기 위해 통일안을 만들게 됐다"고 취지가 나와있어 당시 세태를 엿볼 수 있습니다.

2000년에는 경기 이천에서 고스톱에서 돈을 따고도 개평 2,500원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화가 나 살인을 저지른 것을 시작으로 앙심을 품었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무려 4명을 살해한 연쇄살인 사건도 벌어졌죠. 사실 화투로 촉발된 비극적 사건들은 그 수를 일일이 언급하기 어려울 정도인데요.

분당 살인 사건, 농약 사이다 사건 등을 보면 화투놀이가 넘어온 때부터 거의 100년이 돼가는 지금까지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 하죠. 도대체 화투가 뭐기에. 다시 한 번 묻지 않을 수 없는데요.

민족 대명절 추석, 귀향 인구가 줄었다지만 친척들이 한 자리에 모이면 화투의 소소한 재미가 떠오를 수 있겠죠. 한 가지 더하자면, 가족끼리의 화투라도 판돈이 커지면 도박죄도 적용될 수 있는데요. 혹시 이번 명절 화투판에 둘러앉게 되더라도 놀이는 놀이로 즐길 수 있는, 앙심이 아닌 추억을 쌓는 시간을 보내도록 해야겠습니다.

이유지 기자
박서영 데이터분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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