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반경이 좁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일상의 사회적 관계의 폭도 좁아졌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지만 동료 교수들과 친절한 학과 직원들, 수업을 도와주는 유능한 조교들은 필요한 일이 있을 때만 화상회의를 통해 만난다. 연구실 앞에서 듣던 옆방 동료 고양이의 근황도, 복도에서 오랜만에 마주친 대학원생의 끝나지 않는 논문 이야기도 들을 일이 없다. 아침 10시면 커피를 건네주던 학과 앞 매점에서 일하는 학생의 활기찬 목소리를 들은 지도 오래다. 아침 늘 같은 버스를 타면 인사를 건네던 기사 아저씨, 날씨 이야기를 나누던 이웃 동네 주민들을 볼 일도 없어졌다. 좀 깐깐해 보이던 동네 도서관 사서 아주머니는 잘 지내고 계실까?
이렇게 우리가 당연시 여기던 이런 느슨한 관계를 사회학자들은 약한 연결망이라고 한다. 사회학자 그라노베터가 쓴 논문에서 나온 표현인데, 그는 가족과 친구 같은 강한 연결망 못지 않게 스쳐 지나가는 작은 인연들이 우리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약한 연결망을 통해 우리는 가족과 절친에게서 늘 듣는 오래된 뉴스가 아닌 새로운 정보를 접하고 다양한 가치관과 견해를 접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그래서 사회 구석구석을 이어주는 넓은 약한 연결망을 가진 사람들은 더 좋은 직장을 찾고, 성공적인 직장생활을 하고, 또 혁신적 아이디어를 떠올릴 가능성도 높다는 연구가 있다. 사회 전체로는 이런 약한 연결망이 다양하고 복잡한 현대 사회를 하나로 이어주는 접착제 역할을 한다.
최근 저서에서 사회학자 스몰은 약한 연결망의 또 다른 역할을 조명하는데, 사람들이 느슨한 관계에 있거나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깊은 속내나 고민을 털어놓는 경우가 예상 외로 많다는 것이다. 스몰에 의하면 이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가족이나 친구와의 가까운 관계가 오히려 고민을 나누기 부담스럽게 만들 수 있다. 부모님이나 배우자가 너무 걱정할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친지나 친구들도 알게 될까 염려스럽고, 괜히 잘못 말을 꺼냈다가 관계가 불편해질 위험도 있다. 내 처지를 공감해 주고 유용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오히려 느슨한 관계에 있는 사람인 경우도 많다. 또 가장 친한 사람들이 꼭 필요한 순간 곁에 있는 것은 아니고 그럴 때 마침 옆에 있는 지인이나 낯선 사람에게 속내를 털어 놓는다. 스몰의 연구는 약한 연결망이 우리의 마음의 건강을 위해서도 무척이나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생활의 폭이 집과 집 근처 식품점 및 산책로로 좁혀진 일상에서 약한 연결망의 폭도 많이 좁아졌지만, 그래도 남아 있는 소중한 느슨한 관계들이 나와 가족을 지탱해 준다. 아침마다 뒷마당에서 하루 계획을 씩씩하게 이야기해 주는 옆 집 꼬마 아가씨와 그 언니를 졸졸 따르는 동생, 오늘도 어김없이 큰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는 이웃의 부부, 그리고 아침마다 산책길에서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이름도 모르는 할아버지가 없다면 이 새로운 일상은 많이 퍽퍽할 것이다.
추석이 돌아온다. 미국으로 치면 추수감사절인데, 칠면조 고기는 여전히 맛이 없지만 한 해를 돌아보면서 감사의 마음을 나누는 이들의 전통은 맘에 든다. 올해는 멀리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뿐 아니라 내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약한 연결망의 모든 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추석을 보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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