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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잊을 얼굴, 그리운 얼굴, 기다리는 얼굴

입력
2020.09.21 04:30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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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대학로 블루칩’ 극작가 겸 연출가 오세혁이 공간, 사람, 사물 등을 키워드로 무대 뒤 이야기를 격주 월요일자에 들려드립니다.


뮤지컬 '빨래'는 비정규직 직장인 서나영과 이주노동자 솔롱고, 가난한 이웃들의 서울살이를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내 관객들 사이에서 '힐링 뮤지컬'이라 불린다. 씨에이치수박 제공

뮤지컬 '빨래'는 비정규직 직장인 서나영과 이주노동자 솔롱고, 가난한 이웃들의 서울살이를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내 관객들 사이에서 '힐링 뮤지컬'이라 불린다. 씨에이치수박 제공


관객 (觀客) [명사] 운동 경기, 공연, 영화 등을 보거나 듣는 사람.

세계 여성의 날 기념 초청공연이 끝난 후, 대기실에서 서로의 틀린 부분을 지적하며 화를 내고 있었다. 갑자기 청소노동자 한 분이 불쑥 들어오더니 만 원 한 장을 쥐어주고 떠났다. 황급히 따라가서 어떤 영문인지 물었다. 그분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말했다. “내 이야기라서 그래요.”

4대강 공사 반대 촛불문화제에 공연 중이었는데 술 취한 어르신 한 분이 마시던 소주병을 던졌다. 그대로 달려가 껴안으며 물었다. “아까운 소주를 왜 던지세요! 차라리 따라주세요!” 그분은 빨개진 얼굴로 말했다. “아 그냥 좀 외로워서 그랬지. 진짜 따라줘?”

후배의 어머니가 투병 중이었는데 같은 병실 환자들과 공연을 보고 싶어 하셨다. 뮤지컬 ‘빨래’를 보여드렸다. (심우성 배우님 감사합니다.) 그날 밤 후배가 보낸 사진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건강한 얼굴들이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너무 오랫동안 웃었다. 참 고맙다”는 문자와 함께.

한 초등학교 교실에서 어린이극을 공연했다. 외계인 친구들이 우주선을 타러 떠나며 공연이 끝났다. 무대를 정리하는데 담임 선생님이 얼굴을 푹 숙인 어린 친구의 손을 잡고 서 있었다. “죄송해요. 친구들이 우주로 떠난다고 이렇게 울고 있네요.” 서둘러 말했다. “마침 우주선 시동을 걸고 있어서 안 떠났어. 마지막으로 인사할래?” 배우들이 분장을 덜 지운 얼굴로 나왔고, 어린 친구는 활짝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연극을 처음 시작했을 때, 산타 알바를 한 적이 있다. 극단 선배가 산타 복장으로 유치원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고, 나는 산타의 의전을 담당했다. 아이들이 신나는 얼굴로 선물을 받으러 가는데, 한 아이가 나를 콕콕 찌르며 말했다. “가짜죠?” “아니, 진짜 산타할아버지란다.” “에이, 모자에 상표가 있는데.” 그 천재적인 관찰력의 아이는 말문이 막힌 나에게 윙크를 하며 말했다. “비밀은 지킬게요. 많이 힘들죠?”

아버지는 연극을 하겠다는 아들을 늘 걱정했다. 꾸중, 호소, 푸념, 울분, 눈물, 온갖 방법으로도 아들의 결심을 꺾지 못한 아버지는 한 가지 소원을 조건으로 허락해 주었다.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딱 한 번만 공연해다오. 친구들한테 자랑하고 싶다.” 육십이 넘은 아버지가 알고 있는 유일한 극장이었다. 아들은 그 소원을 들어주지 못했다. 얄궂게도 아들은 남산드라마센터의 공연을 보려고 줄을 서 있는 와중에 아버지의 부음을 들었다.

대학로 대표 스테디셀러로 꼽히는 뮤지컬 '빨래'도 코로나19로 이달 초 공연을 중단했다. 하지만 배우와 스태프는 관객을 다시 만날 그날을 기다리며 여전히 무대를 지키고 있다. 씨에이치수박 제공

대학로 대표 스테디셀러로 꼽히는 뮤지컬 '빨래'도 코로나19로 이달 초 공연을 중단했다. 하지만 배우와 스태프는 관객을 다시 만날 그날을 기다리며 여전히 무대를 지키고 있다. 씨에이치수박 제공


관객, 관객, 관객, 나는 관객이란 단어를 한마디 말로 정의하기가 힘들다. 나에게는 관객이 늘 얼굴로 기억된다. 두 시간짜리 공연을 보기 위해 먼 지역에서 왕복 10시간을 오가는 관객의 얼굴, 좋아하는 공연을 수없이 보며 대사를 외워서 자체 대본을 써낸 관객의 얼굴, 고3 시절 학교에서 보여준 공연 한 편이 잊히지 않아서 연극영화과로 전공을 바꾼 청소년 관객의 얼굴.

남산 드라마센터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사람이 앉아 있었던 객석에 카메라가 설치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밤새 ‘객석 거리두기’를 준비하고 가까스로 올라간 공연들이 처음으로 매진되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극장의 기쁨 혹은 극장의 슬픔이 연달아 들려올 때마다, 오랜 세월을 거치며 만나 왔던 뭉클한 얼굴들이 연달아 떠오른다.

극작가 겸 연출가 오세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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