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씨엔블루, SF9 등을 배출한 기획사 FNC엔터테인먼트는 신인 그룹 피원에이치(P1H) 데뷔를 앞두고 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를 내달 8일 내놓는다. 아이돌 가수가 주인공인 청춘 영화는 아니다. ‘피원에이치: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라는 제목의 이 영화는 독특하게도 ‘북두칠성을 이끄는 희망의 별 알카이드와 악마의 별 알코르의 전설’이라는 SF적 상상력을 내세운다. 코로나19시대에 묘하게도 분노를 일으키는 바이러스 창궐로 폐허가 된 세상을 소년들(피원에이치 멤버들)이 구하는 설정이다.
K팝 아이돌 그룹 마케팅으로 스토리텔링 기법을 활용한 세계관을 내세우는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피원에이치는 데뷔에 앞서 영화를 먼저 개봉한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게다가 다큐멘터리도 아닌 극영화다. FNC엔터테인먼트 측은 “그룹의 색깔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대중에게 설득력 있게 소구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했다"면서 "짧은 분량의 영상이나 몇 컷의 이미지로 세계관을 보여주기보다 자세한 설명과 서사가 담긴 영상으로 구현할 필요성을 느껴 장편 영화로 제작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대대적인 성공 이후 K팝 기획사들 사이에서 '세계관 구축'이 마케팅의 필수 항목으로 자리잡고 있다. 여기서 세계관은 ‘세계와 인간의 관계나 인생의 가치, 의의에 대한 관점’이라는 사전적 의미와는 거리가 있다. 영화 ‘스타워즈’나 마블이 만들어낸 가상의 시공간을 뜻하는 영화적 세계관(cinematic universe)과도 다르다. K팝에서 세계관은 현실을 바탕으로 가상의 이미지나 서사를 더해 구축한 세계를 뜻한다.
K팝에서 세계관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건 2012년 SM엔터테인먼트가 그룹 엑소를 내놓으면서부터다. 엑소는 태양계 외행성인 ‘엑소 플래닛’에서 온 초능력 소년들이라는 판타지 콘셉트로 출발해 독자적인 세계관을 구축했다. 이후 방탄소년단이 세계관을 통해 팬덤을 확장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활동 초기부터 앨범을 낼 때마다 연작 형식의 서사와 세계관을 만들어온 이들은, 소년들의 성장과 자아 찾기 같은 이야기를 풀어가며 ‘BTS 유니버스’를 넓혀 가고 있다.
빅히트엔터테인먼트는 이 같은 세계관을 바탕으로 웹툰 ‘화양연화 파트0: 세이브 미’과 소설 ‘화양연화 더 노트’를 내놨고, 게임과 캐릭터에 이어 드라마도 준비 중이다. 이처럼 잘 구축된 세계관은 IP(지적재산권)를 확장시켜 기획사의 매출 증대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
K팝 기획사들이 전담 인력을 두면서까지 세계관 구축에 공을 들이는 건 해외 시장 공략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한 대형 기획사 임원은 “K팝의 해외 진출에 있어서 언어의 장벽을 넘게 해준 것이 세계관”이라며 “언어가 달라도 아티스트가 전하는 메시지와 세계관을 파고드는 팬들이 늘면서 해외 팬덤까지 커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최근 데뷔하는 K팝 그룹은 거의 예외 없이 각자의 세계관을 내놓고 있다.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경우도 있고, 단서들만 던져놓고 해석을 유도하는 경우도 있다. 빅히트엔터테인먼트가 지난해 내놓은 그룹 투모로우바이투게더(TXT)는 소년들의 성장 서사를 내세운다. 2년차 그룹 에이티즈도 마음 속 보물을 찾아 여정을 떠나는 청춘들의 모험과 방황, 그 속에서의 자아 찾기와 성장을 이야기한다. YG엔터테인먼트의 신인 그룹 트레저는 ‘자신만의 보물을 찾아나가는 소년들’이라는 콘셉트로 활동을 시작했다.
세계관 마케팅이 활발해지면서 유사한 콘셉트로 등장하는 그룹들도 점점 늘고 있다. 타깃 층인 청소년기에 느끼고 경험할 법한 방황과 고민, 모험, 성장, 자아 찾기 등이 K팝 그룹 세계관의 단골 주제로 쓰이면서 점점 식상해진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세계관이 기획자나 아티스트의 사유에서 나와야 하는데 거창한 캐치프레이즈로 그치는 경우도 있다”며 “이처럼 단순히 끼워 맞추기 식이 되면 오래지 않아 진부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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