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보이콧으로? 상소기구 '개점 휴업'
WTO 불신ㆍ탈퇴 압박 거세질듯
세계무역기구(WTO)가 미중 무역전쟁을 촉발한 미국의 ‘관세폭탄’이 규정에 위배된다며 중국 측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실질적 제재가 어려운 것은 물론,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위상에도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할 것으로 보여 ‘서류상 승리’에 불과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오히려 미국의 WTO 탈퇴 위협과 양국 갈등만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15일(현지시간) WTO 1심 패널은 미국이 2018년 중국산 제품에 부과한 2,340억달러(276조1,000억원) 규모의 추가관세가 무역 규정에 맞지 않는다고 판정했다. 미국이 중국만 겨냥해 관세를 매긴 것은 부당하고, 또 ‘무역정책은 모든 회원국에 동일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오랜 규칙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당시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의 지식 재산권 침해와 정부보조금 부당 지급 등을 문제 삼아 사실상 사문화됐던 ‘무역법 301조’를 근거로 징벌 관세를 부과했고, 이는 무역전쟁의 도화선이 됐다.
미국은 겉으론 강하게 반발했다.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이날 성명을 통해 “전적으로 부적절하다”며 “미국은 불공정 무역 관행에 스스로 방어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WTO의 편향성을 꼬집으면서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이 WTO를 활용해 미국 노동자와 기업, 농민, 목장주 등을 이용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위협했다. 다만 “기술 도둑질을 막기 위한 중국의 새롭고 집행 가능한 약속이 포함된 양국간 1단계 무역합의에는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라며 확전을 자제하는 모습도 비쳤다.
일간 워싱턴포스트는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 접근에 외교적 흠집을 낸 사건”이라고 해석했다. 미국이 그간 각국을 상대로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온 ‘보복관세’가 국제무역 관행에서 벗어난 무리수임을 입증한 첫 판정이라는 이유에서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은 임기 내내 중국은 물론 유럽이나 캐나다와 같은 동맹국에도 고율관세 카드를 앞세운 무역 압박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 입장에선 WTO 판정 결과로 실리도 명분도 잃을 게 없어 보인다. 블룸버그통신은 “중국에 서류상 승리를 안겼지만 미국이 이미 상소 절차를 해체해 WTO를 절름발이로 만든 만큼 의미는 없다”고 평가절하했다. WTO 최종심 격인 상소기구 심리는 건당 3명의 위원이 맡는데, 미국이 상소위원 임명 보이콧을 선언하면서 정족수 부족으로 지난해 12월부터 개점휴업 중이다. 미국이 상소를 하더라도 제대로 절차를 밟아 최종 판결을 내리기 어렵다는 얘기다.
더구나 미국은 일찍부터 WTO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이후 줄곧 “WTO 개혁이 이뤄지지 않으면 탈퇴하겠다”며 무용론을 펴왔다. 지난해 8월에는 재임 기간 내 탈퇴 가능성을 거론하기도 했다. 믿지 못하는 국제기구의 결정을 따를 의무가 없는 셈이다. 여기에 중국이 무작정 당하지 않고 대미 보복조치를 단행한 점도 판정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지적된다. 채드 보운 미 피터슨 국제경제정책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베이징은 WTO 판단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했다”면서 “중국의 보복관세 역시 WTO 규정을 어긴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이번 판정은 트럼프 행정부의 WTO 탈퇴 의지만 더욱 다지게 했다는 분석이 많다. 그는 이날도 “WTO가 중국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도록 내버려 둔 만큼 우리도 뭔가를 해야 할 것”이라며 “나는 WTO의 열혈 팬이 아니다”라고 경고했다. 블룸버그는 “이번 분쟁의 승자는 없다. 미국과 중국, WTO까지 모두 패자”라고 단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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