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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로 좌천된 판사, 과거의 상처와 재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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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로 좌천된 판사, 과거의 상처와 재회하다

입력
2020.09.11 04:3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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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희 신작 장편 '복자에게'

김금희 (사진) 신작 장편 ‘복자에게’는 제주의 과거와 현재를, 아름다운 풍광과 이면의 진실을 함께 마주본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김금희 (사진) 신작 장편 ‘복자에게’는 제주의 과거와 현재를, 아름다운 풍광과 이면의 진실을 함께 마주본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제주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모순된 정체성을 지닌 공간 중 하나다. 모두가 그 아름다움에 감탄해 마지 않는 대표 휴양지이면서, 동시에 섬 곳곳에 흩뿌려진 피의 역사가 잔상처럼 아른거리는 곳이기도 하다. 현기영의 ‘순이 삼촌’을 비롯, 제주의 비극이 소설로 쓰여진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학은 모순 앞에서 늘 조심스러웠고 때문에 제주의 진실은 여전히 변방의 진실이기도 했다.

김금희 신작 장편 ‘복자에게’는 이 같은 제주의 과거와 현재를, 아름다운 풍광과 이면의 진실을 함께 마주본 작품이다. ‘경애의 마음’(2018) 이후 나온 두번 째 장편으로, 작가는 2년 전 가을 제주에 머무르며 이 소설을 썼다. 정식 출간도 전에 이미 3쇄를 찍었다.

소설은 제주 본섬 주민도 그 존재를 잘 모르는 작은 섬 ‘고고리섬’을 배경으로 한다. 외환위기 여파가 채 가시지 않은 1999년의 초봄, 열세 살 소녀 이영초롱은 부모의 사업실패로 인해 고고리섬 보건소 의사로 일하던 고모에게 맡겨진다.

남동생이 아니라 똑똑한 자신이 서울에 남아야 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피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배되듯 제주로 떠밀린 영초롱은 그곳에서 복자라는 촌스런 이름의 또래 여자아이를 만난다. 복자는 영초롱이 겪은 나쁜 일이 할망신에게 인사를 하지 않아서라며 다짜고짜 그를 할망당으로 이끌고, 엉겁결에 “우리 집이 완전히 망해버렸다”는 일생일대의 비극을 털어놓게 된 영초롱은 복자와 자연스레 단짝이 된다.


김금희 '복자에게'. 문학동네 발행. 244쪽. 1만4,000원

김금희 '복자에게'. 문학동네 발행. 244쪽. 1만4,000원


그러나 둘의 우정은 마을 어른들 갈등에 휩쓸리며 위기를 겪고, 제대로 화해할 겨를도 없이 영초롱은 서울로 돌아가게 된다. 영초롱은 복자에게 보내는 긴 편지를 쓰지만 끝내 부치지 못한다. 시간이 흘러 영초롱은 연수원을 수석으로 졸업한 엘리트 판사가 되지만, 법관의 일이 “쓰레기 분리수거”와 다를 바 없다는 데에 깊은 회의감을 느낀다. 결국 분노만 남은 채 법정에서 욕을 한 것이 빌미가 되어 서귀포시 성산지원으로 징계성 인사발령을 받게 된다. 그렇게 열패감에 휩싸여 돌아온 제주에서 영초롱은 복자와 다시 만난다. 십수년만에 재회한 복자는 의료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다 유산으로 아이를 잃고 의료원과 산재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소설의 중심 사건인 복자의 소송은 실제 제주의 한 의료원에서 일어났던 산재사건을 소재로 한다. 2009~2010년 사이 임신한 제주의료원 소속 15명의 간호사 중 5명이 유산하고 4명이 선천성 심장질환을 가진 아이를 낳은 이 사건은, 열악한 근무환경과 유산 사이의 관계성이 입증된 지 10년만인 올해 '업무상 재해'로 인정 받았다. 복자는 소설에서 지난한 소송을 이끌며 어린 시절과 다름 없이 씩씩하게 싸워나간다. 영초롱은 친구의 편에 서서 다시 한번 법의 가능성을 믿어보기로 한다.

언뜻 아름다운 제주의 사계절 풍경과 이성적이고 냉철한 법의 언어는 아득히 멀어 보인다. 그러나 유년의 기억과 현재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결국 하나로 흘러가는 역사이듯, 제주 역시 사람의 일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곳이고, 법의 역할은 이 복잡하게 얽힌 사람들 간의 말을 차분히 듣고 차근히 풀어내주는 것이다. 제주와 법이라는 소재는 소설에서 이질감 없이 어우러진다.

무엇보다 자칫 겉돌 수 있는 이야기를 하나로 완성시키는 힘은 작가의 특기인 성실하고 사려 깊은 문장이다. 제주의료원 산재사건부터 전대협 자살방조 사건, 4ㆍ3사건과 국정농단 사건, 판사 블랙리스트 등 복잡한 사회적 이슈들이 수시로 등장하지만 작가는 촘촘한 문장으로 이들 사건을 소설 한 켠으로 자연스레 데려다 놓는다. 소설을 다 읽은 독자는 더 이상 제주를 단순한 여가나 낯선 역사의 대상이 아니라, 깊은 숨을 몰아쉬는 사람들이 사는 삶의 터전으로 볼 수 있게 될 것 같다.

소설 마지막에 이르러, 유년 그리고 제주와 화해한 영초롱은 다시금 편지를 쓴다. ‘섬의 오래된 신과 보리밭에게, 해녀들에게, 고양이를 닮은 돌과 물고기에게, 뿔소라 껍데기로 장식된 담장과 아이들이 잠든 무덤에게, 갯장구와 바닷바람과 정박한 배들’에게, 그리고 복자에게 보내는, 마침내 부칠 수 있게 된 편지를.


한소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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